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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부흐고비 2020. 3. 29. 10:02

열무가 있는 여름 / 배혜숙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날씨는 싱싱하다 못해 퍼덕퍼덕 살아있다. 그래서 여름은 밝다. 오만한 하늘이 세상을 굽어보는 날, 열무김치를 담는다.

​ 냉장고 속, 여러 개의 김치통에서 제각기 다른 맛의 열무김치가 익어가고 있는데 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무청이 생생한 열무를 산다.

씹으면 아삭아삭 상큼한 맛을 낼 것 같은 연한 줄기와 그 줄기에 매달린 파릇한 초록의 잎사귀가 생명의 소리로 나를 부른다. 가지런히 묶여서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열무를 보면 생각 없이 두 단을 사고 만다.

열무를 풀어헤치자 식구들이 한심한 듯 쳐다본다. 여름내 밥상 위에 올린 반찬은 거의 열무김치였다. 끼니때마다 열무 비빔밥이나 열무 국수, 심지어는 샌드위치에도 열무김치를 듬뿍 넣어주었다. 딸아이는 아예 김치장사로 나서면 어떠냐며 은근히 나무란다. “김치 장사가 어디 맘대로 되냐? 맛이 문제지.” 딸아이에게 쏘아붙이고 내 손맛을 탓한다. 그것도 괜찮다. 돈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열무김치를 줄 능력이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어디 있으랴.

열무김치를 담그는 시간은 중요하다. 되도록 지나간 시간을 잊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한다. 열무가 소금에 절여지는 한 시간 남짓 좀 바쁘다. 마늘을 찧고 고추를 빻고 양파껍질을 깐다. 마늘처럼 부패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고추처럼 제 빛으로 주위를 물들일 열정은 있는 것일까? 양파처럼 자신을 다 들여내 보이지 않고도 남을 울릴 수 있을까. 묻고 또 묻는다.

밖은 덥다. 선풍기가 색색거린다. 풀물이 끓으면서 나는 열기로 부엌은 덥다. 탱탱한 여름 해는 빛의 화살을 마구 쏘아대더니 창 밖에서 혀를 날름댄다. 그러나 나는 평화롭다. 열무 탓이다. 초록이 주는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간을 맞추느라 몇 번이나 국물 맛을 본다. 인생의 희비, 농담, 화복이 어우러져 맛을 낸다면 이런 김치 국물 맛이 될까? 잘 익은 고추를 한 주먹 빻는다. 눈물이 난다. 인생의 매운맛을 아는 나는 분쇄기를 쓰지 않는다. 어머니가 쓰시던 절구에 나무공이로 천천히 빻는다. 붉은 물이 튀면서 점점 선명한 빛이 된다.

고추를 넣자 뽀얀 국물이 약간 붉은 빛을 띈다. 풀물에 고추가 섞이자 또 다른 맛을 낸다. 마늘 다진 것도 적당히 한 스푼 넣는다. 양파 두개를 얇게 썰어 넣었다. 초생달 모양을 한 양파는 무 줄기와 어우러진다. 소금기를 머금은 열무는 단단함을 과시하며 초록이 짙다.

제대로 된 재료를 넣었고 염담 맞추기도 이제 웬만큼 할 수 있다. 그런데 깊은 맛이 없다. 그렇다, 익지 않은 탓이다. 갓 담근 생김치가 아닌가? 새 것은 언제나 풋내가 난다. 여린 비린내 같기도 한다. 어머니는 날내라고 하셨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러하듯 김치도 날내가 가시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일에 겁 없이 달려들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했고 미움도 키웠다. 풋내기 때였다. 제대로 김치 멋을 내려면 시감이 필요하듯 나 또한 익어서 고개를 숙이는 데는 남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김치가 잘 익어 제맛을 낼 대 손님을 청한다. 열무김치 한 사발 수북히 담고 , 된장찌게를 끓여 뚝배기 채로 올리면 된다. 그리고 때깔 좋은 고추장 한 종지에 갓 지어낸 밥이면 여름 밥상으로 그만이다.

잘 익어 탄산음료 맛도 나고 새콤한 맛도 있다. 은근슬쩍 깊이 익어 혀끝에서 감칠맛을 더 해준다. 질그릇 단지에서 막 떠낸 국물이 목 줄기를 타고 내려가면 그 시원함을 어디에다 비교할까? 그래 이 맛이다. 사람도 익어 가면 은근히 부드러워진다. 겸손이라는 감칠맛을 지니게 된다.

내 집에 초대된 손님은 풋내가 가신 사람이면 좋겠다. 수수하고 텁텁한 사람이면 더 좋을 것이다. 둥글게 둘러앉아 열무비빔밥을 만들어 입 크게 벌려 맛있게 먹으며 웃고 싶다. 텃밭에서 열무가 새순을 피울 때의 감동을 공유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밋밋한 인생살이에서 조화로운 삶을 원한다면 열러 종류의 열무김치를 담다 볼일이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맵싸한 국물 맛을 우려낸다. 밀가루를 조금만 풀어 국물을 맑게 하여 담백한 맛도 내 본다. 젓갈을 넣어 버무린 열무김치도 가끔 상에 올린다. 삭은 젓갈의 특유한 맛이 잃었던 입맛을 찾게 해 준다. 걀죽걀죽 썬 무를 넣으니 깔끔하고 시원하다. 새우젓을 넣고 국물을 걸쭉하게 만들어 된장찌게와 함께 먹는 맛도 일품이다.

통마다 다른 맛의 열무가 익어가고 있으니 부자 부럽지 않다. 시장에 가면 언제나 열무가 나를 기다린다. 여름은 좋다. 궁극적으로 반찬 걱정은 끝이다. 열무김치로 한 여름이 끝없이 넉넉하다. 손님이 오면 한 통씩 줄 수 있어 더욱 좋다.

그 열무김치가 제맛을 잃어가더니 가을이 왔다. 여러 번의 실패와 제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열무김치 담그기는 성공할 수 있었다. 살아감에 있어서 실패란 필요하다. 나는 아직도 사는 방식이 서툴러 실패의 연속이다. 또 몇 번의 실패가 있어야만 가을 아침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대책 없이 열무를 사지 않는다. 아마 내년 여름까지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열무김치가 없는 밥상은 허전하다. 반찬 걱정을 끝없이 해야 한다. 태양이 익을 대로 익은 여름이라야 열무김치 담그기는 제격이다.

오후녘, 시장을 보러간다. 속이 찬 배추를 골라야 한다. 사람도 가을이면 텅 비어 허한 마음을 채워 좀 여물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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