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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북창北窓 / 오창익

부흐고비 2020. 3. 28. 22:07

북창北窓 / 오창익


남쪽으로만 창을 내고 살겠다던 시인이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 푸른 초원을 마음껏 바라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그늘진 북쪽에다 창을 내달고 먼 하늘만을 건너다보며 산다. 그렇다고, 맑은 햇빛이나 푸른 초원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것만치나 아깝고도 소중한 고향을 그 쪽 하늘 밑에다 두고 왔기 때문이다.

​ '胡馬依北風이요. 月鳥화南枝란 시가 있다. 잡혀온 말이나 쫓겨 온 새도 고향 쪽으로만 머리를 두고, 깃 또한 튼다 함인데, 북으로 창을 낸 실향민의 마음인들 그와 무엇이 다르랴.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창을 통해 고향을 보는 마음이 어떤 것인 줄을 알지 못한다.

​ 어디 창문뿐이랴. 피난 살림 30년이 넘도록 서울 북쪽 변두리를 단 한 번이라도 떠나 본 적이 없는 고집스런 나의 제한주거, 그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직장이야 동서남북 어디라도 가릴 바가 아니지만, 당일 코스의 산행이나 조행도 으레 강남보다 덜 붐비는 호젓함 때문도 아니요, 융단을 펼친 듯 곱게 단장한 통일로의 코스모스 꽃길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넉살처럼 통일의 종이 울리면 한 걸음이라도 먼저 앞장서서 달리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놓친 붕어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고집이기보다는, 언젠가는 지나가다 다시 물어 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자리를 못 뜨는 낚시꾼의 미련과도 같은 것, 가물가물한 기다림 그 때문이다.

​ 그러니까,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내 고독한 산행이요 조행이지만, 그건 언제라도 왁자지껄 떠날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의 고향 나들이에도 비길 수 있다 해서, 햇빛이 쏟아지는 넓은 초원을 마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남창보다는, 어둡지만 그리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지 못하는 하늘을 위해, 그 하늘밑의 소중한 기억들을 오래오래 붙들어 두기 위해 나는 북쪽으로 창을 트고 산다.

​ 임진강 가, 경의본선이 동강이 난 지점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한때는 그 표지판 앞 잔디밭에다 떡국을 끓여 놓고, 내 어린 딸애들은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북쪽 할머니께 눈을 감고 새해 세배를 드리곤 했다.

​ "세배 받으세요. 큰 손녀딸 이연이예요...."

​ 하지만 그 딸애가 커서, 어느새 남의 아내가 되어 지금은 어엿한 아기 엄마가 되질 않았는가. 그 사이 표지판도 풍우에 씻겨 글씨조차 알아볼 길이 없어지고.

​ 풍우에 씻긴 것이 어찌 글씨뿐이랴. 그 철길을 따라 동상을 입은 언 발을 질질 끌며 남하하던 기억에도 녹이 슬어. 지금은 볏짚 낟가리 속에서의 새우잠도 폭격에 풍비박산이 되어 같이 오던 누나를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매던 배고픔도 모두 꿈속의 일인 듯 가슴에 와 아리게 닿질 않는다. 뿐인가. 드럼통에 매달려 대동강을 건너는 나에게, 꼭 살아 돌아오라고 흔들어 주던 어머니의 옥양목 손수건도 아지랑이처럼 멀기만 하다.

​ 세월 탓이다. 이도 저도 볼품없이 초라해진 내 나이 탓이다.

​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게 세월이라 하더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7년 전 내 손수 설계하여 집을 지을 때 북쪽으로 창을 하나 달아 내게 한 것은, 어이없이 고향을 잏고 오듯 남은 세월마저 속절없이 놓치기가 억울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세월의 발자국 소리야말로 귀보다는 눈을 감고 마음을 기울여야 알아듣는 법, 햇빛이 쏟아지는 환한 창가에서야 어디 엿들어 보기라도 하겠는가.

​ 그러니까, 남창이 한낮이라면 내게 있어 북창은 늘 고요한 한밤중이다. 가고자 하면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의 넓고 시원한 고향 길이 남창이라면, 북창은 나와 같은 실향민이 조심조심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가는 좁고도 굽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붙잡기만 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는 어머니의 손때 묻은 치마끈과도 같은 오솔길인 것을....

​ 그러기에 지친 마음으로 가까이 가면, 한동안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윽고는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으로 다시 씻겨 새 돛을 달아 주는 아늑한 포구浦口, 그게 나의 북창 언저리다. 더러는 아픈 상처를 만져도 주고 이글거리는 노여움도 삭혀 준다. 어쩌다 잊고 살았던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아직은 젊게 뛰고 있음에 새삼 놀라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래서 아침저녁, 때로는 늦은 밤에라도 다가서 보는 북창 가, 살아왔음에 대한 요행보다는 끝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로 하여 나는 늘 그 앞에서 정적해지고 새로워진다.

​ 소나무로 테를 둘러 터놓은 좁은 공간, 비록 한 평에도 못 미치는 창문이지만 내게는 그 어떤 명품이나 고가의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다. 대를 이어 아이들에게, 그 다음 세대까지라도 소중한 가보이듯 길이 전해지고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호마胡馬나 월조에 버금가는 실향민의 아픔으로, 간절한 기다림으로.

​ 지금은 한란寒蘭의 계절, 마침 열 송이가 활짝 피어 고향 가는 기러기인 듯 날개짓을 하기에, 나는 북창 가까이로 그 화분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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