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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창北窓 / 오창익
남쪽으로만 창을 내고 살겠다던 시인이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 푸른 초원을 마음껏 바라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그늘진 북쪽에다 창을 내달고 먼 하늘만을 건너다보며 산다. 그렇다고, 맑은 햇빛이나 푸른 초원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것만치나 아깝고도 소중한 고향을 그 쪽 하늘 밑에다 두고 왔기 때문이다.
'胡馬依北風이요. 月鳥화南枝란 시가 있다. 잡혀온 말이나 쫓겨 온 새도 고향 쪽으로만 머리를 두고, 깃 또한 튼다 함인데, 북으로 창을 낸 실향민의 마음인들 그와 무엇이 다르랴.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창을 통해 고향을 보는 마음이 어떤 것인 줄을 알지 못한다.
어디 창문뿐이랴. 피난 살림 30년이 넘도록 서울 북쪽 변두리를 단 한 번이라도 떠나 본 적이 없는 고집스런 나의 제한주거, 그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직장이야 동서남북 어디라도 가릴 바가 아니지만, 당일 코스의 산행이나 조행도 으레 강남보다 덜 붐비는 호젓함 때문도 아니요, 융단을 펼친 듯 곱게 단장한 통일로의 코스모스 꽃길이 좋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넉살처럼 통일의 종이 울리면 한 걸음이라도 먼저 앞장서서 달리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놓친 붕어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고집이기보다는, 언젠가는 지나가다 다시 물어 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자리를 못 뜨는 낚시꾼의 미련과도 같은 것, 가물가물한 기다림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갔던 곳을 가고 또 가는 내 고독한 산행이요 조행이지만, 그건 언제라도 왁자지껄 떠날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의 고향 나들이에도 비길 수 있다 해서, 햇빛이 쏟아지는 넓은 초원을 마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남창보다는, 어둡지만 그리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지 못하는 하늘을 위해, 그 하늘밑의 소중한 기억들을 오래오래 붙들어 두기 위해 나는 북쪽으로 창을 트고 산다.
임진강 가, 경의본선이 동강이 난 지점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란 표지판이 서 있었다. 한때는 그 표지판 앞 잔디밭에다 떡국을 끓여 놓고, 내 어린 딸애들은 생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북쪽 할머니께 눈을 감고 새해 세배를 드리곤 했다.
"세배 받으세요. 큰 손녀딸 이연이예요...."
하지만 그 딸애가 커서, 어느새 남의 아내가 되어 지금은 어엿한 아기 엄마가 되질 않았는가. 그 사이 표지판도 풍우에 씻겨 글씨조차 알아볼 길이 없어지고.
풍우에 씻긴 것이 어찌 글씨뿐이랴. 그 철길을 따라 동상을 입은 언 발을 질질 끌며 남하하던 기억에도 녹이 슬어. 지금은 볏짚 낟가리 속에서의 새우잠도 폭격에 풍비박산이 되어 같이 오던 누나를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매던 배고픔도 모두 꿈속의 일인 듯 가슴에 와 아리게 닿질 않는다. 뿐인가. 드럼통에 매달려 대동강을 건너는 나에게, 꼭 살아 돌아오라고 흔들어 주던 어머니의 옥양목 손수건도 아지랑이처럼 멀기만 하다.
세월 탓이다. 이도 저도 볼품없이 초라해진 내 나이 탓이다.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게 세월이라 하더니...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7년 전 내 손수 설계하여 집을 지을 때 북쪽으로 창을 하나 달아 내게 한 것은, 어이없이 고향을 잏고 오듯 남은 세월마저 속절없이 놓치기가 억울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세월의 발자국 소리야말로 귀보다는 눈을 감고 마음을 기울여야 알아듣는 법, 햇빛이 쏟아지는 환한 창가에서야 어디 엿들어 보기라도 하겠는가.
그러니까, 남창이 한낮이라면 내게 있어 북창은 늘 고요한 한밤중이다. 가고자 하면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운 좋은 사람들의 넓고 시원한 고향 길이 남창이라면, 북창은 나와 같은 실향민이 조심조심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가는 좁고도 굽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붙잡기만 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는 어머니의 손때 묻은 치마끈과도 같은 오솔길인 것을....
그러기에 지친 마음으로 가까이 가면, 한동안 어지럽기는 하지만 이윽고는 맑은 물과 시원한 바람으로 다시 씻겨 새 돛을 달아 주는 아늑한 포구浦口, 그게 나의 북창 언저리다. 더러는 아픈 상처를 만져도 주고 이글거리는 노여움도 삭혀 준다. 어쩌다 잊고 살았던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아직은 젊게 뛰고 있음에 새삼 놀라고 감사하기도 하다. 그래서 아침저녁, 때로는 늦은 밤에라도 다가서 보는 북창 가, 살아왔음에 대한 요행보다는 끝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로 하여 나는 늘 그 앞에서 정적해지고 새로워진다.
소나무로 테를 둘러 터놓은 좁은 공간, 비록 한 평에도 못 미치는 창문이지만 내게는 그 어떤 명품이나 고가의 보석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다. 대를 이어 아이들에게, 그 다음 세대까지라도 소중한 가보이듯 길이 전해지고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다. 호마胡馬나 월조에 버금가는 실향민의 아픔으로, 간절한 기다림으로.
지금은 한란寒蘭의 계절, 마침 열 송이가 활짝 피어 고향 가는 기러기인 듯 날개짓을 하기에, 나는 북창 가까이로 그 화분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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