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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군산에 가면 / 김학

부흐고비 2020. 3. 27. 08:08

군산에 가면 / 김학


​ 군산(群山)은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쌓아놓은 노적가리다. 거리거리 골목골목 내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점, 햇살 한 줌조차 나와 생경한 사이가 아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낯설지 않고, 창공에 유유히 흐르는 구름 떼마저 초면 같지가 않다. 높고 낮은 빌딩이며 눈에 잡히는 산마루, 그리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서해바다의 크고 작은 파도까지 온갖 추억이 엉겨 붙어 있는 곳이 바로 군산이다.

​ 군산은 지금 인구 28만 정도의 조그만 항구 도시다. 금강을 사이하여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충남 장항이 마주하고 있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선유도를 비롯하여 온갖 전설과 설화로 얼룩진 17개의 유인도와 50개의 무인도가 황해바다에 바둑알처럼 놓여져 있다. 이름 하여 천혜의 비경 고군산열도(古郡山列島)라 하던가.

​ 굽이쳐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가 황해와 맞닿은 곳, 아름다운 푸른 바다, 천혜의 수려한 경관, 풍부한 자원이 한데 어우러져 일찍이 찬란한 금강문화를 꽃피워 왔던 곳 군산…. 나는 그런 군산을 애써 잊으려고 했었다. 군산은 정을 붙일 수 없는 곳이라고 폄하하기조차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속뜻을 드러내기 싫은데서 오는 역설이었다.

​ 내가 군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 9월이고, 군산을 떠난 것은 1980년 11월말. 스물 일곱 살 때 들어갔다가 서른여덟 살에 나온 셈이다. 내 인생의 황금기를 그곳에서 보냈다. 그러니 군산은 내 젊음을 송두리째 묻어둔 무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만 해도 천하는 내 손안에 있는 듯 호기에 넘쳤고,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산정일망정 단숨에 정상을 정복할 수 있다는 기개가 넘쳤다. 어는 것 하나 두려울 게 없었던 시절이다.

​ 군산의 사계절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군산의 봄바람은 처녀총각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하고, 월명공원의 벚꽃 무더기는 눈처럼 곱다. 월명공원에서 만나는 해풍은 짧조롬한 바다 냄새를 싣고 오지만 더위를 식히는 데는 그만이다. 군산의 가을은 월명공원에서부터 비롯된다. 공원의 나무들이 군복을 벗고 제대복으로 갈아입으면 그때부터 군산의 가을은 열린다. 군산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다. 눈부신 설국(雪國)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밤, 월명공원은 인적미답의 데이트 코스다. 설익은 연인 사이일지라도 눈 쌓인 그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농익은 연인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배가 심한 월명공원에 눈이 쌓이면 조심스레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미끄러지고 자빠지기 십상이다. 연인끼리라면 자연스레 껴안거나 보듬게 되기도 한다. 그런 어간에 둘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에는 고속도로가 뚫리게 된다. 눈 내리는 월명공원을 거니노라면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 같기도 하고, 한국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모름지기 삐걱거리는 연인이나 부부라면 일부러 눈 내리는 날을 맞아 월명공원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 군산은 연인들의 천국이다. 하늘·바다·물, 어느 쪽으로나 교통이 열려 있는 곳이다. 열차 여행을 즐기는 연인이라면 장항선이나 군산선 열차를 이용해도 좋고, 바다에 안기고 싶은 연인이라면 관공유람선을 타고 고군산열도로 빠지거나 도선장으로 나가 장항행 배를 타도 그만이다. 주머니가 넉넉한 연인이라면 비행장으로 나가 서울, 제주도행 가운데 어느 한 노선을 택해 여객기에 몸을 실으면 신선이 된다. 이처럼 열린 도시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 옛날엔 볼 수 없었던 명물이 하나 생겼다. 이름 하여 금강 하구 둑. 군산과 장항을 잇는 이 둑은 금강을 가로질러 축조된 것으로서 길이가 무려 1,841m나 된다.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담배 한 대 참이면 지나게 되지만, 그것은 낭만스럽지 못하다. 발목이 시더라도 걸어볼 일이다. 가다가 힘겨우면 쉬어서 가고, 쉬면서 서해 낙조에 눈길을 주거나 잔잔한 담수호를 응시하노라면 절로 피로가 가실 것이다. 간단없이 불어보는 바닷바람은 등에 밴 땀방울을 닦아 줄 터이고.

​ 지난 4월의 마지막 주말, 군산문인협회의 초대를 받아 전국수필의 날 행사가 열린 군산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불현듯, 군산의 옛정에 울컥 치밀어 오는 감격을 느꼈다. 개 바위 보듯했던 군산이 나를 감싸주는 기분에 젖었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졌다. 막혔던 봇물이 터진 듯 내 안에 갇혀 있던 군산에 대한 그리움이 쏟아져 나왔다. 그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뜨락'이라는 고전적인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유교적인 가풍을 지닌 나의 외갓집을 떠올렸다. 잘 건사된 여섯 칸 짜리 기와집이며 잘 가꿔진 정원, 그리고 정갈한 음식차림 때문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차림표에서도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가 있었다.

​ '진지 한 그릇 1,000원.' 여느 식당이라면 '공기밥 한 그릇 1,000원'이라고 써 붙이는 게 예사인데, 그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 "진지 잡수셨습니까?"

​ 끼니때가 지나서 어른을 뵈면 으레 이렇게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 고급스러운 '진지'란 단어가 사라져가고 있다. 잊고 살던 일상의 어휘를 군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 집에 도착하여 새삼스레 국어사전을 들춰보았다. '진지'란 어른의 밥을 높이어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나는 군산의 '뜨락'이라는 식당에서 처음으로 어른 대접을 받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낱말 하나에 이리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도 그리 흔치는 않을 듯하다. 군산에서 만난 '진지'란 낱말에서 군산 사람들의 전통적인 참 멋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군산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신흥 도시이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가 군산을 좋은 이미지로 널리 알린 바 있다. 그러나 군산은 이제 자력으로 21세기를 열어갈 서해안시대의 국제관광도시로서 거듭나려 하고 있다. 4천여 만 평의 임해공단과 1억 2천만 평의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군산신항건설, 고군산국제항건설, 등의 대단위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는 군산. 이 계획이 완성될 21세기의 군산을 그려보면 가슴이 설렌다.

​ 그 때 다시 군산을 찾더라도 내 젋은 날의 추억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젊은 날 함께 거닐었던 S도 여태 군산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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