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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남한산성 풀벌레 / 김영웅

부흐고비 2020. 4. 9. 22:49

남한산성 풀벌레 / 김영웅


오늘도 남한산성 오솔길을 혼자 오른다. 벌써 여러 해를 일과(日課)처럼 걷는다. 바위에 앉아 뭉개 구름과 함께 지내는 멍청한 하루가 좋아서다. 거여동 쪽 산자락의 연병장(練兵場)에서 훈련받는 사병들의 함성이 왼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내가 군사교육에 시달리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느새 사십 년이 흘렀다. 지금도 똑 같은 일이 지겹게 반복되다니 인간사(人間事)는 백년을 자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생각을 바꿔 수 백년을 거슬러 병자호란 때의 졸병이 되어본다. 갑옷에 전립(戰笠)쓰고 창검 들고 전통(箭筒)메고 이 산 등성이 누비다가 춥고 배고프고 힘들면 두고 온 고향산천 부모형제 그려보았으리라. 오랑캐에게 백기(白旗)를 들던 한겨울 추위의 굴욕의 그 날엔 적진 군영(軍營)으로 내려간 임금님의 안위를 염려했을 것인가, 그 보다도 석 달간의 농성에 군량이 떨어져서 아침을 굶은 뱃속의 일이 더 다급했을 것인가.

세월 가니 오랑캐 군사도 물러가고 망국의 치욕도 잊혀졌다. 왕(王)도 가고 졸병도 떠났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어도 숲 속의 풀벌레는 변함없이 철 따라 운다. 숲 속은 축소된 지구촌이다. 사람들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남태평양 이스터섬에서, 또는 중동 예루살렘에서 어디서나 말도 많고 일도 많다. 모두가 생사를 거는 싸움이오 흥정이다. 풀벌레도 생존을 거는 흥정과 교섭을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덤불마다 나무마다, 응달진 골짜기에서 또는 높다란 고개 위에서, 작자글 작자글 난리법석이다.

귀 기울이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록의 오월엔 갓 깨인 애벌레가 연초록 풀빛을 닮아 가녀린 소리로 사르륵사르륵 이슬 젖을 빤다. 한 여름엔 짙푸른 나뭇잎 닮아 굵어진 몸집에 힘이 넘치는 큰 소리로 찌르륵 찌르륵 짝을 찾아 야무지게 운다. 백로 지나고 서늘바람 불어 나무 잎새에 물색이 곱게 들고 볕에서도 힘이 빠지자 끼르륵 끼르륵 쉰 소리로 더욱 거칠게 울어댄다.

짐작컨대 아직도 짝을 못 만났으니 일생은 헛것이 되겠다 하리라. 내 씨알은 어찌되란 말이냐, 내 사랑 어서 오라 하리라. 생존을 걸고 풀벌레가 숲에서 우니 듣는 내 마음도 가야금 줄이 된다. 곁에 있던 이끼 낀 성벽만이 지나간 천년을 되돌아보는지 말없이 웃기만 한다.

성벽 앞에 앉아 새 소리 벗을 삼고 불어오는 바람 따라 치욕의 삼전도(三田渡) 벌판을 내려다본다. 십만의 오랑캐 병사가 묵었다는 진지(陣地)는 흔적도 없고 번화한 도시의 빌딩 숲이 장관을 이뤘다. 모두가 부질없다.

계절이 또 한 번 바뀌어 짧은 가을 지나면 눈이 내린다. 흰눈이 덮인 산, 빙벽 밑에 잠든 우주, 싸움을 하던 병졸은 그 속으로 간 것일까 자취가 없다. 숨어버린 풀벌레가 혹시 그는 아닌가. 춘하추동 가고 오는 자연과 더불어 변화를 반복하는 세상사, 내년에도 풀벌레는 다시 찾아오려니와 백년인들 천년인들 어찌 안 오랴. 달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그를 만나러 오늘도 남한산성 오솔길을 혼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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