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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 서울에 노닐다 / 유득공1


​ 경인년(영조 46년, 1770년) 삼 월 삼 일,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와 더불어 삼청동(三淸洞)으로 들어가 창문(倉門) 돌다리를 건너 삼청전(三淸殿) 옛터를 찾았다. 옛터에는 묵정밭이 남아 있어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자리를 나누어 앉았더니 옷에 녹색 물이 들었다. 청장관은 풀이름을 많이 아는 분이라 내가 풀을 뜯어 물어보았더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수십 종을 기록해 두었다. 청장관은 어찌 그리 해박할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술을 사와 마셨다.

이튿날, 남산에 올랐다. 장흥방(長興坊)을 통해서 회현방(會賢坊)을 뚫고 지나갔다. 남산 가까이에는 옛 재상의 집이 많다. 무너진 담장 안에는 늙은 소나무와 늙은 느티나무가 의젓한 자세로 곳곳에 남아 있다. 높은 언덕배기로 올라가서 한양을 바라보았다. 백악(白岳)은 둥그스럼하고도 뾰족하여 모자를 푹 씌워 놓은 모양이요, 도봉산은 삐죽삐죽 솟아서 투호 병에 화살이 꽂혀 있고 필통에 붓이 놓여 있는 모양이다. 인왕산은 인사하는 사람이 두 손을 놓기는 했으나 그 어깨는 아직 구부정하게 구부린 모습이요, 삼각산은 수많은 사람이 공연을 구경하는 자리에 키 큰 사람 하나가 뒤쪽에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는데 여러 사람의 갓이 그의 턱에 걸려 있는 품새다. 성안의 집들은 검푸른 밭을 새로 갈아서 밭고랑이 줄줄이 나 있는 모양이요, 큰길은 긴 냇물이 들판을 갈라놓은 것처럼 성안을 가로질러 몇 굽이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람과 말은 그 냇물 속에서 활개 치는 물고기이다.

  1.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 실학자로 박지원의 제자이다. 박제가, 이덕무(李德懋),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정조가 발탁한 최초의 규장각 검서관 4인 중 한 명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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