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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잎의 클로버 / 이어령1
현대인에게 있어 행복은 잃어버린 숙제장이다. 누구나 이제는 행복이란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하나의 장식 문자가 되어 사기 그릇 뚜껑이나 아이들 복건이나 시골 아이들의 금박댕기, 그리고 돗자리와 베갯모와 주머니와 방석…. 그런 것들 위에 어쩌다가 수놓여진 복자를 보면 이미 사지가 되어 버린 옛날 금석문을 대하는 느낌이다. 옥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글자 같다.
실상 철이 든다는 말과 행복이란 말은 역비례한다. 행복을 장식품처럼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어른이라고 불러 준다.
이웃집 개 이름만 하더라도 해피이다. 행복은 그렇게 전락하고 만 것 같다. 책상머리에 불이 켜지는 그런 시각에 나는 이따금, 이웃집에서 그 개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해피--"
"해피--"
"해피--"
어둠의 조수가 잔잔하게 밀려오는 골목길을 향해서 기침을 하듯 혹은 각혈을 하듯 이웃집의 미망인은 개를 부른다. 여운도 없이 번져나가는 목소리다.
나에게는 그것이 처량하면서도 모질게만 들린다. 개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아직도 체념하지 못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어둠을 향해 고함치고 있는 소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혹은 좌초된 깨진 선박 위에서 치맛자락을 찢어 흔들고 구원을 청하는 한 여인의 광경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녀는 구원을 청하고 있다. 시꺼먼 파도가 밀려오는 막막한 바다 가운데서 찢어진 치맛자락을 기폭처럼 내흔들고 있다. 더구나 그 개의 이름 '해피'는 '해피니스(행복)'의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에는 반드시 수식해야 할 실체가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해피의 부름 소리는 수식해야 할 실체를 찾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축축한 저녁 공기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행복한--'
'행복한'
그 다음 올 말은 실종된 채 영원히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영상들은 내 상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미망인은 치맛자락 같은 것을 찢어 휘두르지는 않는다. 밀려오는 검은 파도도 없다. 다만 여인의 손에는 쭈그러진 양은그릇이 하나 들려져 있을 뿐이다. 그 속에 생선 가시를 담아 가지고, 개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동안, 아주 잠시 동안 그녀는 어둠을 지켜보고 있는 것뿐이다. 더구나 그 미망인은 16밀리 흑백 영화나 무슨 연재소설이나 혹은 유랑 악극단에 등장하는 파란 많은 미망인, 젊고 아름다운 극적인 그런 미망인이 아니다.
사람은 평범할수록 현실적으로 보인다. 결혼할 때 가지고 온 혼수가 이제는 걸레가 된 것처럼, 그녀에겐 지금 생활에 대한 기대나 소망도 또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져 나르는 사람의 어깨에는 굳은 못이 박여 단단한 근육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그 굳은 살결은 아픔을 견뎌 낸다. 고된 나날은 보드랍던 그녀의 마음에도 감각이 통하지 않는 굳은 못을 박아 놓았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생각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러나 일몰의 시각이면 숲 속의 맹수들도 헤슬피 우는 것이다. 낮과 밤이 옮겨 가는 그 경계선에는, 노동과 휴식이 엇갈리는 그 경계선에는 깊은 공백의 단애가 있다. 누구나 때때로 이 단에 속에 떨어지면 일상적인 평원을 회의하게 된다. 그 미망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부엌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개를 부르며 잠시 어둠을 지켜보고 있을 때 분명히 그녀는 무엇인가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들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날 그 남편이 돌아오던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을….
자기는 지금 개가 아니라 분명히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때부터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독백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그 때'라는 것이 있다. 다른 것은 다 시골의 간이역처럼 기억도 없이 지나쳐 버리고, 언제든 변하지 않는 '그 때'가 말뚝간이 박혀 있다. '그 때보다…' '그 때처럼…'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마음속으로 온갖 생애의 내용과 견주어서 말할 수 있는 '불변의 시간'이란 게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미망인이 '해피'라고 부를 때 돌아오는 것은 그 때의 행복이 아니라 한 마리의 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피'는 지쳐 있다. 온종일 쓰레기통을 뒤지다가--하수구 속에서 죽은 쥐를 뜯다가 해피는 배를 척 늘어뜨리고 그렇게 지쳐서 돌아오는 것이다. 눈은 언제 보아도 진벅거리고 잔등이는 멀겋게 헐어서 털이 빠져 있다. 병든 개--수척하고 게으르고 눈치만을 살피는 돌림병을 앓고 있는 늙어 빠진 개--이것이 '해피'이다.
미망인의 해피는 그런 꼴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로 저녁놀이 번져 가는 엘리엇 씨의 그 일몰 시각에 해피는 쩔뚝거리면서 온다. 한 토막의 생선 가시와 먹다 버린 밥찌꺼기를 찾아 해피는 쩔뚝거리며 온다.
우리들의 행복도 그러한 꼴을 하고 쓰레기통과 질퍽한 하수구와 연탄재가 깔려 있는 음산한 골목길로 해서 문득 우리 곁으로 온다. 출타한 여인이 불의의 시각에 비단옷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문턱 앞에 와 앉듯 그렇게 돌아오는 행복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 꿈꾸던 행복의 이미저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푸른 언덕길, 이슬 속에서 숱하게 빛나던 클로버의 잎사귀들이다.
누나는 그 때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잎사귀가 세 개밖엔 없잖아… 그런데 지금 우린 네 개짜리 클로버를 찾는 거야! 저 흔해 빠진 세 잎 클로버들 사이에서 그것은 몰래 몰래 숨어 있거든… 그래서 행복하게 될 사람만이 숨어 있는 그 네 잎의 클로버를 찾아 낼 수 있다는 거지… 이 길섶에도 지금 그것들은 숨어 있을 거지만 보통 사람 눈에는 뜨이지 않는 거야. 남들이 뜯어 가기 전에 우리는 빨리 그 숨어 있는 행복의 잎새를 찾아내야만 된단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풀숲을 헤치면서 정신없이 네 이파리의 클로버를 찾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보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가 흔히 빠진 세 잎의 클로버뿐이었다. 아주 기진해서 머리를 들었을 때, 하늘에는 온통 하얀 클로버 잎들의 환영이 둥둥 떠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거기에도 네 잎짜리는 보이지 않았다. 전나무 끝에서는 솨솨 바람 소리가 울렸다. 광산으로 뚫린 산길을 따라 파란 클로버들은 한없이 뻗쳐 있다. 흰 꽃도 피어 있었다. 누나도 나처럼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풀숲만을 뒤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 클로버를 찾는 거야? 누나, 나는 이제 멀미가 났다. 해가 넘어가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있지도 않는 네 잎짜리 클로버를
찾는 거야?"
누나는 풀어진 단추를 잠가 주면서 어른처럼 나를 달래는 것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행복하게 되려고 애쓰고 있는 거야. 일순이는 말이다… 누나 친구말야… 일순이는 책갈피 속에 네 잎짜리의 클로버를 잔뜩 넣고 다닌단다. 벌써 열 개가 넘어… 이제 두고 보려무나, 일순네는 가난해도 그 애는 다음에 부자가 될 꺼야. 공주처럼 말이다. 우리도 져서는 안 돼. 누가 먼저 따나 나와 경주를 해야 돼. 분명히 네 잎사귀 클로버는 어디엔가 숨어 있으니까…"
나는 빨리 클로버를 따고 싶었다. 그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보다 그것을 일찍 따서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이러다가 해가 기울면 더 이상 풀숲을 헤치지는 못할 것이다.
누나는 먼 데까지 갔다. 비탈진 둔덕에 엎드려서 풀 냄새를 맡듯 머리를 풀숲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아직도 행복의 클로버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때 문득 나는 전나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선교사의 붉은 양옥집 유리창을 보았다. 저녁 햇살을 받고 보석처럼 그것은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세상에 네 잎 달린 클로버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없다면--없다면 만들 수밖에 없다. 누나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보지는 못 할 것이다. 가짜라도 네 이파리의 클로버를 만들어야 한다. 클로버의 잎사귀 하나를 줄기째 찢어 내서 세 잎 달린 클로버의 줄기에 갖다 붙였다. 아주 그럴 듯하게 침을 발라서… 숨을 죽이고 몰래 숨어서 행복의 모조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창조와 속임수는 피가 같은 쌍생아이다. 창조나 속임수나 그것은 다 같이 숨어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약간의 수줍음과 오만이 서로 미묘한 갈등을 이룬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것은 아주 유사한 것이다.
다만 창조는, 예술과 같은 그런 창조는 신에 대한 속임수이지만 우리가 단순히 '속임수'라고 하는 것은 노름판에서 도박사들이 트럼프 장을 속이는 것처럼 다만 인간의 눈을 속이는 데에 불과하다. 그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보상 없는 모조품'을 만들어 낸다는 면에서 도박사나 가짜 보석 상인과 구별될 따름이다.
어쨌든 나는 그 날 애매하게 행복을 '속여서 창조'했다. 속임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창조이기도 했다. 네 잎사귀 클로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낸 것이니까.
딱하게도 누나는 속아 넘어갔다. 너무 지쳐 있던 탓이었을까. 놀랍고 부러운 표정을 하고 누나는 내 손끝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클로버의 이파리는 세어 보는 것이었다.
"하나… 둘… 셋… 넷… 그… 그래, 그래. 정말 이파리가 네 개가 있구나… 네가 이겼다. 나보다 빨리 찾아냈으니까.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것을 땄니?"
애초에는 장난이었지만 누나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자 내 태도는 달라지고 말았다. 무엇을 훔친 것처럼 가슴이 두근댔다. 속아 넘어 가게 한 것이 기뻐서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남을 속였다는 가책 때문이었을까. 남이 완전히 믿어만 준다면, 남을 끝내 속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진짜 네 잎의 클로버와 다를 것이 없다. 나는 다시 보다 완벽하고 멋진 모조품들을 만들어 냈다.
속임수도 창조도, 기도도 그것은 다 같이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를 택한다. 착한 일도 악한 일도 그 산실은 남이 보지 않는 어두운 밀실에서 생겨난다. 몰래 뒤돌아 앉아서 그렇게 나는 행복의 클로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누나는 나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지막엔 잎사귀들을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핼쑥했던 것을 보면 누나는 몹시 초조했던 모양이다. 그 때까지 끝내 하나도 따지 못했던 것이다. 전나무 가지 사이에서 누렇게 빛나던 선교사 집 양옥의 유리창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누나는 울먹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나보다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는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그 중에서 하나만 자기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누나네 반 아이들은 모두 네 잎사귀 클로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일부러 숙제도 하지 않고 깜깜할 때까지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졸라서 집으로 가는 것이니 한 개만 달라고 했다. 내가 싫다고 하니까 누나는 꿔 달라고까지 했다. 언젠가 재수 좋은 날 자기도 틀림없이 한 개쯤은 네 잎 클로버를 딸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소중하게 책갈피 속에 넣어 두었다가 돌려 줄 터이니 그 때까지만 꿔 달라는 것이었다.
누나는 울고 있었다. 분해서 울고 있었다. 비로소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짜였다고,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가짜 네 잎사귀의 클로버였다고… 나는 그렇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겉으로는 완강히 거절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딴 그 클로버가 진짜였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를 일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그 때 모든 것을 누나에게 주었을 것이다.
왜 나는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가? 누나가 너무도 모조 클로버를 진짜라고 믿어 주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나는 나를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행복하게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슬퍼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누나는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모조의 행복, 모조의 클로버.
누나는 전쟁 때 남편을 잃었다. 젊은 나이로 가난하게 그리고 외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쩌다 지금도 내 집에 들리면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들여왔구나. 어딧제니? 너는 어려서 네 잎 클로버를 잘 찾아내더니만… 정말 그래서 잘 사는가 보구나. 그러고서도 욕심은 또 얼마나 대단했니… 글쎄 한 개만 달래는데도 끝내 그 클로버를 움켜쥐고 보여 주지도 않았지… 정말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은 누구나 다 찾아내는 그 네 잎 클로버를 나만 한 개도 찾아내질 못했으니 말이다. 언제나 뒤늦었어. 남들이 뒤지고 간 뒷자리만 쫓아다녔었어. 그래서 지금도 이렇지 않니…"
나는 말하고 싶었다. 위로를 해 주기보다도 진실을 말해 주고 싶었다.
"누님, 이게 어디 행복인가요. 가짜지요. 전부 가짜지요. 그 때 내가 땄다는 클로버도 가짜였어요. 이 피아노도, 번쩍거리는 자개장롱도, 서재의 이 자개 화병과 그 꽃까지도 모두가 행복의 모조품입니다. 행복의 모조품… 모조품은 남이 속아 줄 때만이 진짜처럼 행세할 뿐입니다. 누님, 자기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모조품의 비극입니다. 이것들은 남에게 자신을 행복한 체 보이려고 꾸며 낸 속임수들이지요. 남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 주면 자기가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누님, 왜 사람들은 큰 대문을 세우고 싶어 하는지를 아십니까? 페르시아의 왕처럼 왜 사람들은 자기가 다 소유할 수도 없는 많은 방을 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웃는 법입니다. 남들한테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거예요. 모조품인 줄 알면서도 남에게 들키지 않으면 진짜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지요. 제 스스로 제 행복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때의 클로버는 누님! 가짜였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나는 내 이야기를 곧이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 행복을 또 나누어 달라고 할까 봐서 공연히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라고 오해할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행복의 모조품으로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실 행복을 느끼는 순간 벌써 우리는 행복 그 밖으로 나가게 된다. 설령 진짜 행복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과거형일 경우, 또는 미래형일 경우다. 지금 당장 자기가 행복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행복은 '내'가 아니라 '나의 대상'이다. 그것은 '앞에' 혹은 '뒤에'있다.
나는 단 하나 행복과 같이 있는 사람, 행복과 손잡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시골의 기독교인이었다. 새벽마다 설화산 둔덕에 있는 황새 바위에 올라 천주께 기도를 드렸다. 예수교를 믿는 사람인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산 부처'라고들 했다. 천한 농부의 자식이었지만 얼굴에는 온화한 희열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늘 아이들과 하께 놀았다. 나는 몇 번인가 그의 등에 업혔던 기억이 있다. 그의 입에서 언제나 샘물처럼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내가 고향에 들렀을 때는 이미 그는 천치의 불구자가 되어 있었다. 공산군이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 모진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장난으로 시작된 고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말하면 풀어 준다고 했는데 끝내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다가 내리치는 몽둥이에 머리와 중추 신경을 다쳤던 것 같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렸고 전신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이 지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천주와 함께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들은 그에게서 신을 빼앗아 갔던가?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의 양지 바른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월을 보낸다고 했다. 이제는 청년이 아니라 40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그는 젖먹이 아이처럼 말을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되고 가끔 또 무슨 생각이 나면 벙실거리며 웃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 집을 찾아갔을 때에도 그는 햇볕이 드는 뜰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마치 아이들이 뒤를 보는 것 같은 자세를 하고 눈은 어딘가 먼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를 잡힌 베짱이가 방아를 찧듯 머리를 끝없이 끄덕이고 있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앉아 있던 자리에 그늘이 지자 짐승처럼 두어 발자국 햇볕이 드는 곳으로 옮겨 앉았다. 그는 온종일 소리 하나 지르지 않고 이렇게 해바라기처럼 햇볕을 따라 옮겨 다니는 것이다. 그는 알고 있을까? 지금 그의 아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효성을 바쳤었던 그의 부모가 모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인가. 또 그는 알고 있을까, 천주가 있다는 것을… 아니, 아니, 저 성서의 말을, 마태복음 제5장 5절에 적힌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짐승처럼 졸고 있는 이 시골의 기독교도 앞에서 나는 행복을 정의한 성서의 구절을 외어 보았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렇다. 그는 의에 주리고 또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행복한가? 과연 천국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일까? 지금 저 희끄무레한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텅 빈 하늘인가? 그는 가난하며 애통하며 목마르다 하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도 지금 느낄 수가 없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억울한 그 핍박에 대해서도 아무 원한이 없는 것이다. 백치는 왜 웃는가. 모멸과 고통 속에서도 백치는 어째서 웃는가. 백치는 행복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그러한 행복을 누가 원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정반대로 만들어진 행복의 모조품이다. 사람들은 불구가 된 그 무명의 기독교인이 불행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가 비참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불행을 의식하지 않는 한 그는 불행하지 않다. 남이 행복하다고 믿어 주는 한,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과는 정반대로….
네 잎사귀 클로버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찾아내려고 한다. 행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가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행복은 순수한 주관 속에서도 살지 않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속되어서도 안 된다.
마테를링크는 아무래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다. 행복의 궁전에서도, 미래의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파랑새를 자기 집 울타리 새장 속에서 찾아냈다는 그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비참해졌던가?
'여러분, 그 새를 찾은 사람은 우리에게 돌려 주셔요.' 하고 치루치루 소년이 소리치는 데서 "파랑새"의 막은 내린다. 하지만 관객들은 아무리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도 막이 다시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 새를 찾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파랑새"의 연극은 다시 계속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치루치루에게 돌려 줄 새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마테를링크는 '파랑새란 먼 데 있지 않고 바로 가까운 자기 집 울타리 안에 있다'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근시안적으로 행복을 찾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치루치루와 미치루처럼 긴 환상의 여로를 더듬지 않고서도 개와 고양이와 설탕, 또 빵의 요정 같은 것을 데리고 가지 않더라도 마법의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초록빛깔의 모자를 쓰지 않고서도 손쉽게 행복은 우리 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하여 '행복'이란 말은 '모험'의 뜻을 상실하고 '동경'의 뜻을 상실했고 '영원'의 뜻을 상실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곳의 행복만 찾아다니다가 행복이란 말까지 상실해 버린 것 같다. 보잘것없는 녹슨 새장에 모조품 파랑새를 사육해 가면서 자위하고 있는 거다. 행복의 개념도 나날이 줄어들어서 이젠 연하장 한구석에 깨알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월급봉투의 숫자나 또는 출근부에 적힌 이름의 서열, 까 나가는 월부 액수, 때 묻어 가는 보험 통장… 이런 것들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의 물거품을--떴다 꺼지는 그 물거품을 바라보고 있다. 멀고 먼 나라, 칼 부세의 '산 너머 마을'보다도 한층 더 멀고 먼 마을에 살고 있을 찬란한, 거대한, 영원한, 그 미지의 행복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몰의 시각에 실종된 우리들의 행복은 돌아오는 것이다. 비에 젖은 들개처럼 온종일 쓰레기통을 쑤시다가 뱃가죽을 늘어뜨리고 어둠을 질질 끌면서, 그리고 눈곱이 낀 눈을 껌벅거리면서 털 빠진 붉은 잔등이에 희미한 별빛을 받으면서 우리 곁으로 그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찢어 붙인 네 잎사귀 클로버처럼 들킬까 조바심을 내는 모조의 그 클로버처럼…
아니 그렇지 않으면 백치와 같은 표정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는 무명의 그 시골 기독교인처럼-- 고개를 끄덕이면서 햇볕을 따라 옮겨 다니면서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그 시골의 기독교인처럼… 그런 꼴을 하고 행복은 우리들 곁으로 온다. 어느 일몰의 시각에.
- 이어령(1934~): 평론가. 수필가.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및 대학원 졸업. 여러 신문의 논설 위원과 이화 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역임. 사변 이후의 비평계에 이론적 기수로 등장하여 김동리와 '실존성의 논쟁'을, 조연현과 '전통론의 논쟁'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그 후 칼럼니스트로 에세이스트로 맹렬히 활약하면서 신화, 전설, 풍속 기타 다방면의 재료를 토대로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해부하였다. 장편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30만부 매진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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