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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 / 전혜린1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10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 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 날 오후의 첫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니나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돈을 다 내어 보이고 그 중에서 1마르크만 가져가게 한 일, 힘없이 혼자서 하숙을 찾아 갔던 일--나는 정말로 내가 파리에 있는 말테나 된 듯한 서글픈 마음이었다.

우선 고국에서부터 연락해 놓았던 아스타라는 학교 사무국에 가서 벽에 붙은 벽보를 찾아야 했다. '빈 방 있음'의 광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모두 값이 비쌌다(내 생각보다). 또 학교에서 멀었다. 그리고 뮌헨은 나에게 마치 라비린트 그 자체처럼 보였었고, 학교에서 5분 이상 더 가는 곳에 가서 살 자신은 나에게 없었다.

그 중에서 나는 겨우 '빈 방 있음, 전기 있음, 학교에서 도보로 5분, 월세 50마르크'라는 꼬불꼬불한 연필 글씨로 쓰인 광고 용지를 찾아냈다. 그 집은 정말로 학교에서 5분쯤 가면 있는 영국 공원이라는 광대한 공원에 임해 있었다.

첫인상이 포의 어셔 가를 연상시켰고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수가 어디 있으랴? 다른 빈 방들은 대개가 '미국인에게 한함'이거나 또 엄청나게 비쌌던 것을….

나는 다시 들어서는 발을 억지로 닫혀 진 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60세 가량 된 극단적으로 비만한 흰 단발머리의 할머니가 나왔다. 키는 작았고 차림새는 누추했다. 나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거나 '방을 빌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상냥했고 입가에는 구수하다고 형용할 수 있는 미소를 띄어보였다. '학교 광고를 보셨습니까?' 할머니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악의는 없는 말투였다. '방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네, 네, 어서 들어오세요.'

방, 내 방인 것이다. 나는 그 할머니를 따라서 긴 낭하를 지나갔다. 낭하는 어두웠고 방이 많았고 방마다 사람의 이름이 작게 써 붙여 있었다. 맨 끝에서 할머니는 멎어서더니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여기 살던 사람이 이틀 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 사람이었지요."
열쇠가 돌려지고 문이 열렸다. 나는 주저하면서 할머니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도 마루처럼 어두웠으나 의외로 깨끗했다. 초록빛 도자기로 된 커다란 난로가 한편 구석에 서 있었고, 전기 곤로가 놓인 대와 흰 요와 이불이 덮인 침대가 하나, 그리고 경대와 찬장이 딸린 콤모데가 있었다. 창은 두개가 영국 공원과 반대 되는 포도로 나 있었고 이중창에 이중 커튼이 둘러져 있었다.

'하시겠어요?' 할머니가 물었다. '네.' '방세는 한 달분 미리 내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나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돌로 포장된 좁은 골목은 완전히 잿빛 안개로 덮여 있었고 물기가 촉촉히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어제까지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안 지나가고 여기는 뮌헨에서도 가장 오래 된 지역이고 폭격도 안 맞은 1920년대 그대로의 문명의 이기만을 쓰고 사는 마을인 것 같았다.

트렁크를 침대 밑에 넣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피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은 안 왔다. 열쇠로 방문을 잠그고 거리로 나갔다. 그 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다섯 시경이었던 것 같다.)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여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내가 유럽을 그리 원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는 근처의 생활 필수품점에 가서 빵 두개와 마가린 한 통을 샀다. 전기 곤로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빵을 먹었다.

학교의 개강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다. 나는 원래 돌아다니거나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고 외국서는 더구나 무서웠다. 그러나 낮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사실 도착 이래 식사다운 식사를 못 해서 배도 고팠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제로제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았으나 별로 눈에 익은 게 없었다. 단 왜지 커틀릿이라는건 나도 알 것 같아 그걸 시켰다. 그러나 프로일라인(하인)이 가져온 것은 우리 개념의 커틀릿이 아니고 돼지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그냥 삶은 것 같았다(실제로 그렇게 요리하는 모양이다.). 나는 힘없이 먹기 싫은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실 것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라는 물음의 뜻도 파악 못 하고 그냥 웃어 보였더니 작은 컵에 맥주를 따라서 갖다 주는 것이었다. 난 그냥 잠잠히 앉아 있었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안고…, 그 때 여러 명의 틴에이저들이 들어오더니 주크박스 앞으로 다가가서 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힐끗 나를 보더니 무슨 판을 눌렀다. 그에 이어서 뜻밖에도 일본말 노래가 새어나오는 데는 아연하여 보고 있었더니 일본의 이별의 노래라고 그 중의 하나가 나에게 알려 주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마 나를 일본인으로 안 모양이었다. 그 때만 해도 뮌헨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없었고 더구나 여자는 구경하려 해도 없었을 때니까 아마 그렇게 짐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역시 웃어 보였을 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글퍼졌고 덜 혼자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오후나 저녁때 그 집을 자주 찾아갔다. 거리도 내 방에서 가까웠고 음식 값도 다른 데보다 싼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프로일라인도 친절했다. 늘 말없이 호의를 보여 주었고 주간지도 내 테이블에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이 음식점이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합숙소인 것도 알게 되었다. 목요일에는 '시의 밤'이 있고 화요일에는 '화가의 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집의 한편 벽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사진이며 편지며 분필 사인이 토마니 링겔나츠니 캐스트너니 좀마니… 하는 쟁쟁한 작가나 화가나 만화가들의 소행인 것도 점점 알게 되었고 이 집이 한때 반나치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일제 아이힝가라는 여류 시인의 존재를 그 여자의 특이한 용모와 매력적인 긴 흑발과 함께 알았다.

가을은 깊어만 갔다.

강의가 끝나면 나는 학우들(오스트리아 여학생이나 프랑스 학생)과 같이 근처의 다방에 가서 크림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때우는 방법도 배웠다. 주립 도서관도 자기 집 내부처럼 환히 알게 되고 뮌헨 시내의 고서점이란 고서점은 다 환히 알게 되었다. 헌 책방 주인과도 친해지고 이미륵 씨 얘기도 듣게 되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파는 군밤 장수의 군밤을 50페니히쯤 사서 교실에서 먹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마음은 몹시 허전했다. 고국에까지 뛰거나 걸어서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서운 심연을 내 마음 속에 열어 놓을 줄은 나도 몰랐었다.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의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에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돼 있는 셀로판지로 담긴 이탈리아 쌀에… 어디서나 그 비전은 나를 따랐다.

뮌헨 대학에서 내 하숙에 이르는 레오폴드 통은 거대한 꼿꼿하게 높기만 한 포플러 가로수로 줄지어져 있었다. 그 길은 온갖 빛의 낙엽으로 두껍게 깔리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이 아름다웠다. 그 거리에는 작은 어항같이 생긴 '유리 동물원'이 있었다. 유리로 기막히게 정교하게 만든 온갖 작은 짐승들, 도자기 발레리나들… 안데르센 동화 속의 나라 같았다.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날 때마다 5분 이상이나 진열장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갖고 싶고 애무하고 싶은 유리 동물들이었다.

그 가게 뒤에 쓰러져 가는 '노아 노아'라는 집이 있었다. 거기는 다다이스트의 집합소로서 늘 해괴하고도 기상천외인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화가들이 수염을 늘어뜨리고 떠들며 담론하는 살롱이기도 한 것 같았다. 때로는 에리카 만의 낭독회도 열리는 모양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제로제보다 더 싼 음식점을 발견했다. 서서 먹는 집이었다. 흰 소시지를 불에 구워서 겨자를 발라 먹는 소시지 집이었다. 거기다가 신 오이 한 개와 리모나데 한 컵을 먹어도 1마르크가 안 되니 싸기도 하려니와 냄새만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맛이 있었다.

먹는 것은 간단히 빨리… 그리고 나는 걸어 다녔다. 학교에서 내 집까지 사이의 골목 그리고 영국 공원 속… 이러한 곳이 내 산보지였다.

어떤 날 나는 백조가 마지막으로 떠 있는 것을 저녁 늦도록 지켜 본 일이 있다. 어둑어둑한 박명 속을 흰 덩어리가 여기저기 모여 있었고 때때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몹시 외로워 보였다.

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음속을 뒤흔들린 편지를 매장한 곳도 이 호수였고 내 꿈과 동경--몇 년이나 길게 지속되었던--을 던져 넣어 버린 곳도 이 호수 속이었다. 이 호숫가의 가스등 밑에서 나는 안개에 감싸이는 쾌감과 머리를 적시는 눈에 안 보이는 비를 맛보았다. 그리고 추위에 떨면서 귀로에 서곤 했었다. 도자기 난로 속에서 석탄이 붉게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쓸쓸하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붉은 불의 혓바닥… 이러한 것과 함께 있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길을 지켜보면서 언제나 어떤 시의 구절을 생각했다.

휴식과 포도주에 넘친 어둠,
슬픈 기타 소리가 흐른다.
그리고 방 안의 부드러운 등불로
꿈속처럼 너는 돌아간다.

공기에서는 서리와 안개와 낙엽 냄새가 섞여서 났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공원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11월 중순--아직 한국에서는 가을이지만 여기서는 눈이 큰 송이로 내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눈이 와도 무섭게 왔다. 세원 둔 자동차가 눈에 폭 파묻혀 안 보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한국서 가져온 얇은 천으로 된 학생용 검은 오버를 입고 오돌오돌 떨면서 학교에 다녔다. 점심은 커피 대신 그로크(펄펄 끓인 포도주)와 수프로 했다. 그래도 추웠다.

때로는 눈이 멎고 다시 영원한 뮌헨의 하늘빛인 회색 구름장이 덮이거나 안개비가 촉촉히 내렸다. 나는 두꺼운 색양말을 신고 두꺼운 머릿수건을 쓰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라고는 없고 나뭇가지가 앙상한 해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검은 나뭇가장이들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변함없는 회색일까? 하고… 아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하나만 있어도 이 하늘이 이렇게까지 우울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물음 '당신이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고 황색 비전을 나는 좇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우울한 회색과 안개비와 백일몽의 연속이었다. 악몽처럼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따라다녔고 절망적인 '고국까지의 거리감'에 나는 앓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뮌헨의 가을 하면 내가 처음 도착한 해의 가을이 생각나고 그 때의 심연 속을 헤매던 느낌과 모든 것이 회색이던 일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것에도 자신이 없었고 막막했고 완전히 고독했던 내가 겪은 뮌헨의 첫가을이 그런데도 가끔 생각이 나고 그리운 것은 그러나 웬일일까? 뮌헨이 그 때의 나에게는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인지, 또는 내가 뮌헨에 대해 신선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개비와 유럽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나의 다시없이 절실했던 고독인지도 모른다.

  1. 전혜린(1934~1965): 수필가. 평남 순천 출생. 독일 뮌헨대 독문과 수료. 여러 대학의 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교수 역임. 31세로 자살함. 자유로운 정신과 현실 세계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 불꽃처럼 살다가 간 지식인이었다. 끈기와 탄력과 집중력을 갖고 생을 긍정했고 생의 완벽성을 구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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