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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스무 살 어머니 / 정채봉​

부흐고비 2020. 5. 30. 22:04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송하다.

어쩌다 사원들끼리 우스갯소리라도 하면 뺨에 먼저 꽃물이 번진다. 한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서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우유를 더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을 하면서 돌아서다 말고 물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그러자 신입 사원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면서 가만가만히 대답하였다.

“스무 살이에요.”

여자 나이 스무 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키웠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 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내음은 때때로 떠오르곤 한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 타는 내음. 고향의 그 내음이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히 보이게 한 날을 기억한다.

유년 시절,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던 날이었다. 이웃 민주네 할아버지한테서 <장화홍련전>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서 나오니 저녁밥 짓는 연기가 골목을 자욱이 덮고 있었다. 먼 바다 쪽으로부터 물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돌을 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할머니가 군불을 때고 있었다. 부엌 문설주에 기대서 있는데 해송 타는 연기가 자꾸 나한테로만 몰려들었다. 그때 기침을 하면서 눈을 비비며 서 있는 내 앞에 막연히 어머니의 모습이 다가오다가는 사라졌다 .해송 타는 연기와 함께. 그 뒤부터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해송 타는 내음이 생각키웠다. 해송 타는 내음을 만날 때면 어머니가 조용히 떠올랐다.

중학생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된 9월 어느 날이었다. 들녘에 나가서 토끼풀을 뜯어 가지고 돌아오니 이불 홑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너 없는 사이에 너그 담임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늘귀에 실을 꿸 양으로 계속 거기만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허긴 너의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솔띠재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 찬 고개를 넘어야 했거든. 너를 업고 네 에미가 친정을 몇 번 다녔으니 그 솔냄새가 너의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네 에미 얼굴을 보여 주랴?”

할머니는 일어나서 장롱 위에 있는 부담을 끌어 내렸다.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가 뚜껑을 열어 보여 준 그 부담 속에는 여러 벌의 여자 옷이 있었다. 남치마며 인조 저고리며 단속곳이며, 그리고 색이 바래지 않은 흉배도 있었고 나막신도 있었다.

나는 부담의 맨 아래에서 한지로 싸여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내게 참으로,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같은 여인이었다.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번 들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희 삼춘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어. 형수 젖, 형수 물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다.

그때 문득 내 앞에 환상의 지구역(地球驛)이 떠올랐다. 순간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대신 어린 아기들이 내려오는 곳. 떠나는 늙은 분들 틈에 끼어 앉았을 스무 살의 우리 어머니……. 쪽찐 머리를 보고 혹시 남겨 놓고 가는 아이가 없느냐고 물어서 울린 사람은 없었을까.

서른한 살 때 나는 아이 하나를 얻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기만 하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이쁜짓을 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괜히 저 혼자 방글거리곤 했다. 나는 그러는 아이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다.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났다.

“네 에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너가 배고파서 울어도 좀체 젖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보다 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서야 일손을 놓고 가서 젖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단다.”

그제야 비로소 스무 살 우리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었다. 아이 우는 소리에 타지 않을 어머니 속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들한테 눈치 보일까 봐 자리를 얼른 뜨지 못했을 우리 어머니.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나였대도 때로는 어머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볼까 봐 내 어린 뺌에 볼 한 번 비비는 것도 우리 어머니는 참 어려웠으리라.

오늘도 하얀 박 속 같은 스무 살 우리 어머니는 그 앳됨 그대로를 지니고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 가는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신다. 풋콩에서와 같은 비린내 나는 부름이 들릴 듯도 한데……. 그러나 이제는 해송 타는 내음마저도 점점 엷어져 가는 것 같아 나는 참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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