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실패자의 신성 / 신채호

부흐고비 2020. 6. 2. 21:25

나무에 잘 오르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 헤엄을 잘 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 하니, 무슨 소리뇨?

두 손을 비비고 방안에 앉았으면 아무런 실패가 없을지나, 다만 그러하면 인류 사회가 적막한 총묘와 같으리니,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앉은뱅이의 죽음은 안 할지니라.

실패자를 웃고 성공자를 노래함도 또한 우부(어리석은 사람)의 벽견이라. 성공자는 앉은뱅이같이 방 안에서 늙는 자는 아니나, 그러나 약은 사람이 되어 쉽고 만만한 일에 착수하므로 성공하거늘, 이를 위인이라 칭하여 화공이 그 얼굴을 그리며, 시인이 그 자취를 꿈꾸며, 역사가가 그 언행을 적으니, 어찌 가소한 일이 아니냐. 지어 불에 들면 불과 싸우며, 물에 들면 물과 싸우며, 쌍수로 범을 잡고 적신으로 탄알과 겨루는 인물들은 그 십의 구가 거의 실패자가 되고 마나니, 왜 그러냐 하면, 그 담의 웅과 역의 대와, 관찰의 명쾌와 의기의 성장이 남보다 백배 우승하므로, 남의 생의도 못하는 일을 하다가 실패자가 되니, 그러므로 실패자와 성공자를 비하면 실패자는 백보나 되는 큰물을 건너뛰던 자이요, 성공자는 일보의 물을 건너뛰던 자이어늘, 이제 성공자를 노래하고 실패자는 웃으니, 인세의 전도가 또한 심하도다.

이와 같이 실패자를 비웃음은 동서양의 도도한 사필들이 거의 그러하지만 수백 년래의 조선이 더욱 심하였으며, 조선 수백 년래에 이따위 벽견을 가진 이가 적지 않으나, 김부식 같은 자가 또한 없었도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일부 노예성의 산출물이라. 그 인물관이 더욱 창피하여 영웅인 애국자--곧 동서 만고에도 그 비루가 많지 안할 부여 복신을 전기에 빼고, 백제사 말엽에 12구뿐 부록함이 벌써 그에 대한 모멸인데, 게다가 또 사실을 무하여 면목을 오손하였으며, 연개소문이 비록 야심가이나 정치사상의 가치는 또한 천재 회유의 기물이어늘, 다만 그 2세 만에 멸망하였으므로 오직 신, 구 당서를 초록하여 개소문전이라 칭할 뿐이요, 본국의 전설과 기록으로 쓴 것은 한 자를 볼 수 없을 뿐더러 또 그를 흉불완하다 지척하였으며, 궁예와 견훤이 비록 중도에 패망하였으나 또한 신라의 혼군을 항하고 위기를 거하여 수십 년을 일방에 패하였거늘, 이제 초망의 소추라 매욕하였으며, 정치계의 인물뿐 아니라 학술에나 문예에도 곧 이러한 논법으로 인물을 취사하여 독립적 창조적 설원, 영랑, 원효 등은 일필로 도말하고, 오직 지나사상의 노예인 최치원을 코가 깨어지도록, 이마가 터지도록, 손이 발이 되도록 절하며 기리며, 뛰며, 노래하면서 기리었다.

그리하여 김부식이 자기의 옹유한 정치상 세력으로 자기의 의견과 다른 사람은 죽이며, 자기의 지은 "삼국사기"와 다른 의론을 쓴 서적은 불에 넣었도다.

그리하여 후생의 조선 사람은 귀로 듣는 바와 눈으로 보는 바가 김부식의 것밖에 없으므로 모두 김부식의 제자가 되고 말았으며, 모두 김부식과 같은 논법에 같은 인물관을 가졌도다. 하늘과 다투며, 사람과 싸워 자기의 성격을 발휘하여, 진취, 분투, 강의, 불굴 등의 문자로써 인간에 교훈을 끼침이어늘, 우리 조선은 그만 김부식의 인물관이 후인에게 전염하여 고금의 실패자는 모두 배척하고 성공자를 숭배하게 되니, 성공자는 아까 말한바 약은 사람이라. 이제 창졸히 '약'의 정의는 낼 수 없으나 세상에서 매양 '약은 사람'의 별명은 '쥐새끼라'하니, 약은 사람의 성질은 이에서 얼만큼 추상할 수 있도다.

(1) 엄청 나는 큰일을 생의치 안하며,
(2) 남의 눈치를 잘 보며,
(3) 죽을 고비를 잘 피하며,
(4) 제 입벌이를 자작만 하여 그 기민함이 쥐와 같은 고로 쥐새끼라 함이라.

아으, 수백 년래의 인물에, 어찌 범이나 곰이나 사자 같은 사람들이 없었으리오마는 대개 쥐새끼들이 사회의 위권을 장악하여 학술은 독창을 금하고, 정, 주 등 고인의 종 됨을 사랑하며 정치는 독립을 기하고 일보일보 물러가 쇠망의 구렁에 빠짐이라.

실패는 이같이 싫어하였는데, 어찌 실패보다 참악한 쇠망에 빠짐은 무슨 연고이뇨, 이는 나의 전언에 벌써 그 이유의 설명이 명백하니라.


 

신채호(1880~1936) 사학자. 호는 단재. 충북 청주 출생. 순수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당시의 식민주의적인 일체의 학설들을 배격하였으며 항일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로 언론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하는 행복 / 안수길  (0) 2020.06.10
그림엽서 / 곽재구  (0) 2020.06.10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 신채호  (0) 2020.06.02
돈세탁 상식 / 엄현옥  (0) 2020.06.01
구렁이 꿈 / 장금식  (0) 2020.06.0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