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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림엽서 / 곽재구

부흐고비 2020. 6. 10. 15:11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동네 목욕탕에서였다. 탈의장에서 옷을 벗다 말고 나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탈의장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욕탕 문의 손잡이를 찾아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 욕탕 안은 한산했다. 나와 그 외에 목욕하는 사람이 둘. 그는 다시 손끝으로 벽을 더듬더니 샤워기 아래에 섰다. 손끝으로 물 온도를 가늠 하던 그는 곧장 샤워를 했다. 비누칠을 하고 두 번 거푸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였다.

​ 샤워가 끝난 뒤에는 양치질이 있었다. 들고 온 작은 손가방에서 그가 칫솔을 꺼냈다. 그는 다시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치약이 잡혔다. 그러나 그는 치약을 스쳐갔다. 그가 찾는 것은 치약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소금통을 그의 앞에 옮겨다 놓았다. 그의 손끝이 소금통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여기가 아닌데….' 그가 혼자 중얼거리더니 금세 내 쪽을 향하고서는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인사를 하면서 그는 환하게 웃었다.

​ 그가 인사를 하는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무슨….' 욕탕 안에서 혼자 생각해 보았지만 정말 적당한 대꾸를 찾을 수 없었다.

​ 양치질을 끝낸 그가 착수한 일은 면도였다. 나는 그가 거울 앞에 서서 얼굴에 비누칠을 하는 것을 보았다. 손가방에서 꺼낸 면도기로 쓱쓱 면도를 했다. 면도기가 지나간 쪽을 손바닥으로 한번 만져 보고 거울에 비춰 보는 시늉을 할 때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 그의 목욕은 아무 탈이 없이 끝났다. 아니 탈의실로 나가는 과정에서 한 번의 작은 실수가 있었다. 그가 욕탕 문을 열고 탈의실로 나가는 순간 곁에 비켜 서 있던 한 손님과 몸이 부딪쳤다. 손님은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미안합니다. 하고 허리를 굽혔다. '허참, 이런 일이 없었는데......' 그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또 밝게 웃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옷장을 찾아 옷을 입고 양말을 신는 모습을 보았다.

​ 내가 그를 두 번째 본 곳은 불로동 다리 위에서였다. 불로동 다리는 광주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작고 가장 낡은 다리였다. 승용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가던 이 다리는 무너진 성수대교 덕분에 완전히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차량 통행이 금지되면서 솜사탕 장수와 군고구마 장수가 다리 한쪽에 들어서기도 하고 여름밤 같은 때엔 다리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소주 추렴을 하는 시민들도 왕왕 생겨났다.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꽤나 낭만적인 포즈를 취하는 연인들의 모습 또한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 다리 위는 미끄러웠다. 이삼일 전에 내린 눈이 반질반질 얼어붙었고 하늘에서는 제법 큰 눈송이들이 내렸다. 나는 시내로 나가는 길이었고 그는 목욕탕이 있는 동네 쪽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 그는 더듬어 가는 지팡이를 지니고 있었고 검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모습이 생소했지만 분명히 목욕탕에서 만난 그였다. 아무런 구김살 없이, 아무런 불편도 못 느낀다는 듯이 목욕을 끝내고 나서던 그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 이날 빙판길을 조심조심 걸어오던 그는 내게 또 하나의 눈여겨볼 얘깃거리를 건네주었다. 그의 가슴 한쪽에 꽃다발이 한아름 안겨 있었다. 프리지아였다. 회색빛의 도시와 노란빛의 꽃다발이 싱싱하게 어울렸다.

"참 예쁜 꽃이네요."
인사 겸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여전히 맑게 웃었다.
"아내가 좋아해요"
아내? 나는 조금 놀랐던 거 같다. 그에게 아내가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건 해 보지 않았다. 그는 불로동 다리를 건너서 목욕탕 있는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나는 한동안 멈춰 서서 꽃다발을 안고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며칠 뒤, 작업실 창문으로 불로동 다리 쪽을 바라보던 나는 또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았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 동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지팡이로 길 앞을 더듬고 오는 친구는 분명히 그였다. 한 사람은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여자였다. 검은 안경을 낀 여자는 완전히 그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 그가 "아내가 좋아해요."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조금 움찔했지만 이번에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에게 아내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여자가 또한 앞을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둘은 길을 더듬어 목욕탕 앞길에서 왼쪽 길로 사라졌다. 달방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 그가 가슴에 안고 있던 프리지어 꽃다발이 입구에 싱싱하게 걸려 있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 그 뒤로도 가끔 그를 보았다. 동네의 슈퍼에서 과일을 사는 모습도 보았고 중국집에서 그와 프리지아를 닮은 그의 아내가 함께 우동을 먹는 모습도 보았다. 그가 목욕을 하러 오는 날이 화요일이라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화요일 오후 두 시쯤 나는 그를 만나러 동네 목욕탕에 가곤 했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목욕을 끝내는 것을 재미스레 지켜보면서 나는 삶이란 그것을 가꿔 갈 정직하고 따뜻한 능력이 있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어떤 꽃다발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곽재구(1945, 광주 태생)의 시는 화려한 문구로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생의 풍경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작동시킨다는 평을 받는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과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을 냈다.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9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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