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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각적 산문 / 이춘희

부흐고비 2020. 6. 13. 00:03

 사진이란 빛이 잠시 머물다간 흔적이라 생각했다. 가까운 친구가 사진작가여서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는 되었지만 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의 흔적을 담아 언제든 그 순간을 재현할 수 있는 것 정도가 내가 유추해 낼 수 있는 사진의 가치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혔다. “사진의 가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내는 데에 있다.” 소설가 정찬의『새의 시선』에 실린 대화체의 문장이다.

 

그는 이것이 영국의 저명한 작가인 존 버거의 말이며 ‘사진의 가치’가 아니라 ‘사진의 권력’이라 말했다고 정정해준다. 유독 이 짧은 글이 한순간에 와 닿았던 것은 요즘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나의 짓거리라 해야 할지 마음의 행태라 불러야 할지 모를 일 때문이다. 물론 이 문장이 함축한 의미를 다분히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올해 초에 오랫동안 운영해오던 매장을 접었다. 국내 여성의류로는 제법 전통이 있는 브랜드의 대리점이었다. 언제나 어깨를 짓누르는 노후라는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몇 년째 망설이다가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누가 말리기라도 할 것처럼 당장 폐업신고부터 했다. 서둘러 본사와 관련된 일들을 마무리 짓고 세금을 완납했다. 컴퓨터에 저장된 본사 홈페이지까지 삭제하고 나니 무거운 옷이라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해져 마음만 먹으면 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고객들의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은 파일이 아직도 컴퓨터에 남아있는 것을 문 닫은 지 몇 달이나 지난 얼마 전에 발견했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 삭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스운 고백이 되겠지만 버튼 하나를 누르는 간단한 손가락 동작에 제동이 걸렸다. 단순한 아라비아 숫자의 조합에 불과한 전화번호들이 창에 불이 켜지면 눈앞에 마치 신기루처럼 여러 가지 형상의 그림들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지난 이십여 년이 오롯이 살아 다가오는 것이다. 이십여 년 전 생활에 떠밀려 엉겁결에 옷 장사에 발을 내딛었다. 돌아보니 내게 주어졌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오늘까지 나를 버티게 해 준 고마운 기회였다.

 

그러나 장사꾼으로 산다는 것이 스스로 설정한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쉬는 날은 염두에도 둘 수 없었던, 캄캄한 터널을 통과해야 했던 처음 몇 해가 지나자 옷을 팔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계획이나 선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주어진 자리에 안주하다보면 결국 장사치가 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내가 해야 할 행동 하나하나에 끝없이 제동을 걸게 만들었다.

 

가령 고객에게 내 쪽에서 전화를 걸지는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거나 나를 찾아온 사람들과 필요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곤 했던,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들이다. 전화는 호객행위나 다름없이 여겨졌고 상품 때문이 아니라 친분을 이용해 장사를 하려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언니 아우하면서 감겨드는 사람들은 당연히 경계해야 되었겠지만 이십여 년을 꾸준히 찾아오는 고마운 분들조차도 굳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를 썼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까. 내가 대단히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공연한 일로 딴지 걸고 까탈 부리는 것이 자존감을 뭉개야 하는 장사치로 물들지 않는 길이라고 믿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매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특히 대리점을 하는 입장에서는 본사와의 원만한 관계가 중요하다. 그것은 매출로 증명되어야 하고 내 수입 역시 장사의 목적이 아닌가. 전화를 하는 것보다는 번거롭지 않고 은근하게 다가가는 문자메시지를 즐겨 사용했다. 직접적으로 상품을 선전한다거나 구매를 권하는 대신 주기적으로 계절에 대한 멘트나 여성 특유의 감성을 가볍게 자극하는 짧은 글을 띄웠다.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 문자를 저장한다는 고객들이 많았고 더러는 바뀐 번호를 남기러 들르기도 했다. 물론 매출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전화번호 뒤에 숨어 심리적 효과를 노린 것은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것보다 더 교묘한 상술이 아니겠는가.

 

나는 역시 장사꾼이었나 보다. 매장을 접고 나니 나를 지키겠다고 만들었던 울타리 안에는 자존감이 아니라 숫자로 남겨진 통장의 빈약한 잔고만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금만 마음을 열었더라면 지금쯤 고객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쉬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십여 년을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자존감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모양새가 좀 미련스럽기는 해도 밉지는 않다. 더러 그립기도 하다. 날기라도 할 것처럼 가볍게 텅 빈 나날을 보내는 이즈음의 나 보다 나아 보인다.

 

저장된 전화번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만이 유일하게 기억을 환기시키고 시간을 뛰어넘어 지난날들을 불러내주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성실한 관찰자가 되어 사진보다 더 세밀한 묘사로 <글로 쓴 사진>이라는 시각적 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글에 기대어 전호번호 파일을 남겨두려 한다. 단순한 숫자의 조합이 숫자가 아닌 것을 불러오는 유일한 창. 어떤 사실적인 묘사보다 더 또렷한 영상들을 불러오는 창. 숫자로 된 이 시각적 산문의 공간을 한동안은 간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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