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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울림은 아름답다 / 최영임

부흐고비 2020. 8. 4. 11:15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산은 지척이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봄은 손짓하고 배낭을 멘 발길은 어느새 산길로 접어든다. 온갖 미세한 소리가 찌든 귀를 씻어준다. 오늘은 어떤 꽃을 만날까? 부푼 기대는 들이며 산을 헤매는 계절병이 되었다.

꽃샘추위가 간간이 봄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먼 곳에서 복수초가 노랗게 봄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긴 겨울동안 조바심을 내던 마음에 봄은 옮겨 앉고 나는 천마산이 부르기라도 하는 듯 내닫는다. 귀 기울이면 나무들의 물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싹눈은 터지기 직전이다. 두터운 낙엽 속에선 이미 작은 속살거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앉은부채였다. 희귀종에 속하는 노란 앉은부채는 철망에 싸여 보호를 받을망정 노란 빛처럼 눈이 부시다. 붉은 앉은부채는 생존경쟁에서 강자에 속하는지 제법 군락을 이루었다.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둥근 모자모양(포)의 방은 실제로 바깥 기온과 5도의 차이를 보인다 하니 스스로 살아갈 방편은 갖춘 셈이다. 때 이른 봄날 숲속 친구들의 좋은 먹잇감이니 숨바꼭질하듯 땅바닥을 기는 모습은 어쩜 전략이리라.

눈에 뜨일 듯 말 듯 너도바람꽃이 낙엽 속에 숨어있다. 너무나 작아 발을 옮겨놓기가 조심스럽다. 누군가 바람꽃에 빗대어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이라 하였다지. 봄이면 바람꽃의 종류를 기억하기도 벅차다. 바위틈 습지엔 산괭이눈이 노랗게 주변을 밝힌다. 추위를 이겨내려 틈바구니에 자리를 잡았을까? 천마산에는 작고 여린 꽃들로 천국을 이룬다.

먼 데를 헤맬 동안 도봉산인들 잠만 잘까? 겨울동안 준비하였던 분만의 때는 지금이다. 부산한 산의 움직임에 덩달아 나도 바빠진다.

동네 어귀나 밭둑에서 하얀 냉이꽃, 쇠별꽃, 노란 꽃다지와 애기똥풀들이 저들 세상을 구가하기 전에 산속의 움직임이 더 부산하다. 나뭇잎이 퍼지기 전에 초본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깔제비꽃이 붉은 자주색 꽃으로 산길을 치장할 즈음 길을 벗어나 깊숙한 곳에선 족두리풀이 수줍은 듯 배시시 웃고 있다. 땅바닥에 턱을 괴고 긴 잎자루 끝의 크고 넓은 잎 사이로 살짝 내민 모습은 영락없는 새색시 자태다. 개미나 땅바닥을 기는 곤충들의 도움으로 수정을 하는 꽃, 저 나름의 자세로 생명을 이어간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꽃의 종류가 변한다. 예쁘다고 찬탄했던 꽃이 며칠 만에 자취를 감추고 또 다른 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차례대로 피고 지는 꽃들에게서 문득 순리를 깨닫는다.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생존과 질서가 보잘 것 없는 식물에서도 엄격하지 않은가?

작은 꽃들의 행렬이 한차례 지나고 나면 어느새 산은 연둣빛으로 몽실몽실 여린 아기 얼굴이 된다. 가장 먼저 초록빛을 자랑하는 귀룽나무를 시작으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의 움직임이 바빠진다. 산벚꽃이 만개하여 연둣빛 산자락에 붉게 수를 놓으면 진달래도 한 몫 거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온통 연두와 분홍이 어우러져 산은 원색의 수채화가 된다. 이때는 밤새워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에 잠을 설치고 유년의 고향 길을 꿈속에서 만난다.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울 때 산자락에서는 생강나무가 가지겨드랑이에 바싹 붙은 노란 꽃망울을 폭죽처럼 터트린다. 꽃이 비슷하니 구분도 어렵다. 공원이나 집주변엔 산수유가, 산에는 생강나무라고 기억하면 꽃의 분간이 쉬워질까? 한동안 산과 들은 노란 물감이 번지듯 물들어 버린다.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였던 진달래가 지면 수수꽃다리의 향이 멀리까지 제 존재를 알린다. 산의 지킴이답게 찔레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산 초입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한다.

깔때기 모양의 붉고 흰 병꽃나무, 작은 꽃을 수없이 늘어뜨린 단풍나무 등의 붉은색 꽃이 한바탕 쓸고 지나면 조팝나무, 덜꿩나무, 팥배나무, 쪽동백 의 새하얀 꽃이 초록위에 더욱 돋보이는 시기가 된다. 갖가지 색상이 조화를 이루어가며 어느 듯 소쩍새가 독민호민호獨愍呼愍糊 길게 울음 울고 하루해는 길어진다. 봄은 절정에 다다른다. 겉으로 보기에 적막하기 그지없는 숲은 이렇듯 숨차게 피고진다.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데 새소리 바람소리 외엔 침묵인 것만 같다. 봄은 차례를 준수하며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렇게 살아간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따금 한발 물러서 타인을 보듯 자신을 돌아보는 때가 필요하듯이. 나무는 움직일 수 없어도 그들 나름의 거리를 유지하며 몇 세대를 거뜬히 산다. 옆으로 자신을 불릴 수 없으면 위로 치솟되 어깨동무를 하듯 정겨운 선을 이룬다. 능선은 손에 손잡고 강강술래를 하는 우리네 모습을 닮았다.

그들만의 질서는 어울림의 한마당이다. 한 해, 두 해, 여러해살이풀들은 그들대로 어우러져 숲의 일원이 되고, 나무는 모두를 끌어안으며 산을 이룬다. 이들의 질서를 본받고 어울림을 배운다면 내 삶도 숲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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