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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반딧불이처럼 / 최윤정

부흐고비 2020. 8. 24. 15:18

슬픈 발광이다. 열흘 뒤면 풀숲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생의 마지막을 맞으리라. 우주 안에서 미천하기로는 저나 나나 매양 한가진데 별걱정 다 본다는 듯 반짝이는 엉덩이를 눈앞에 들이민다. 저수지 둑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겨우 찾아낸 녀석이건만 저를 쳐다보던 내 눈빛만 괜히 머쓱해진다. 생의 절정기를 맞은 반딧불이가 여름밤을 간질이고 있다.

어린 시절, 사내 녀석들은 반딧불이의 꽁지를 떼어내 이마에 문지르곤 했다. 번득이는 얼굴로 달려드는 여름밤의 시답잖은 귀신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사내아이들이 우-하고 달려오면 계집애들은 와-하고 도망가 주었다. 나는 놀이에 엮인 무언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얼굴에 짓이겨진 반딧불이가 가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해서 치를 떨며 도망 다녔다.

오랜만에 만난 예민한 옛 동무를 굳이 손안에 가두지 않으리. 일찍이 나에게 개 궂은 잔인함은 없었으니 가만히 지켜만 볼 일이다. 반디의 꽁지 불이 허공을 지휘하듯 안단테로 날고 개구리가 박자에 맞춰 울어 준다. 기다림도 연주의 일부라는 것을 깨우친 듯 적절할 때를 맞춰 황소개구리도 한 번씩 목청을 떤다. 북소리의 여운처럼 저수지 위를 덮는 울음, 오늘 밤엔 너도 괴팍한 이국(異國)종이라는 굴레를 벗고 네 목소리를 내 보렴. 한밤의 물가는 관대하고 평화롭다.

김의 부음을 들은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며칠 전 이미 장례와 삼우제까지 다 마친 상태여서인지 소식을 전하는 동창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냉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회사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던 나는 동창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처음엔 김의 어머니, 다음엔 김의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말인 줄 알았다. 김이 죽었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젊었다. 이제 막 우화(羽化)를 마치고 날아올랐을 그의 죽음을 어찌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단 말인가.

오래된 생선처럼 퀭한 눈으로 입 벌리고 서 있는 내 머리 위로 매미만 째지게 울어댔다. 매미 울음소리는 왠지 더위를 더 짙게 하는 느낌이 들지만, 그 생애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욕하지 않는다. 고행 같은 삶을 살다 가기는 반딧불이도 매미 못지않다. 다른 곤충에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아 부화한 애벌레는 이듬해 봄까지 여섯 번의 탈피를 거쳐야 한다. 그러고도 오랫동안 땅속에서 번데기로 지내다 겨우 우화를 거쳐 땅 위로 날아오르지만, 겨우 십여 일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반딧불이는 울음이 아니라 발광으로 자신의 마지막 생을 밝힌다. 여름밤, 나는 그 환한 수행(修行) 앞에 잠시 넋을 잃는다. 내일이면 풀잎 이슬보다 먼저 사그라질 운명이 처연하다. 신께서 반딧불이에 목소리를 주지 않았음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 같은 날, 물오른 여름풀 사이를 헤집는 반딧불이의 노래를 듣게 된다면, 나는 풀숲 위로 눕고 말았을 것이다. 한순간 빛남으로 끝날 짧은 생의 노래와 춤은 여름 밤하늘에 더 많은 별비를 내리게 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김을 반딧불이보다도 먼저 스러지게 했을까. 촛불에 타오르는 지방(紙榜)처럼 천천히 맴돌며 공중으로 오르는 반디의 꽁지 불을 따라가 보니 하늘에 잔별이 가득하다.

‘얼레리 꼴레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내 주변에서 앵앵거리는 아이들의 장난이 귀찮았다. 김과 나는 이곳, 마을 저수지에서 몇 번 마주쳤다. 댐을 넘어오는 보리새우를 잡으러 갔다가 그랬고, 소질이 있다기에 잡은 붓을 놀려보러 갔다가 그랬다. 그 뒤의 몇 번은 우연이 아니었지만 정작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의 러닝셔츠를 태우지 않고 물려 입는, 녹슨 자전거를 타고 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통학하던 김이었다. 일찍 속물이 되어버린 나는 김과 아무 사이도 아니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나 가정형편상 김의 장래희망 난에는 언제나 ‘농부’라는 두 글자가 자리 잡았다. 적어도 장래희망이라면 대통령이나 판사, 검사쯤은 돼야 그럴듯했다. 남자아이들은 경찰이나 소방관 정도는 적어줘야 무난하던 시절이었다. 쓴다고 다 그리되는 것도 아닌데 화가라고 한 번쯤 적으면 어떻다고 부러 농부라고 눌러 적는 그가 우직하기보다는 미련스럽단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교복을 입고 벗으며 다 크도록 김은 제 꿈에 대해서 가벼이 말하지 못했다. 달빛 아래, 기름때 까만 손톱을 비비며 그림이 좋다고 겨우 말하던 김의 고백은 매번 저수지 아래로 미끄러졌다. 부들 밑동을 잡고 허우적대는 울먹임을 나는 한 번도 손잡아 주지 않았다.

얼마 만에 와보는 곳인가. 외진 곳이라 그런지 잊었던 기억을 대강 더듬어도 충분한 길잡이가 된다. 변한 것은 나뿐인 듯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저수지로 올라오는 길에 지나친 김의 감자밭이 생각났다. 홀로 남으신 김의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에는 제법 넓어 보였다. 혹여 수확 철을 이미 지나친 것은 아닐까. 도회지로 뿔뿔이 흩어진 동창들은 이럴 땐 별 소용이 없다. 인근 공단에 취직하고 비번인 날엔 농사도 지으며 잘 지내던 김이 트럭에 치여 죽었다는 사실이 그의 어머니를 얼마나 황망하게 했을까. 아무 사이도 아니라 말하는 나까지 한밤중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게 한 죽음인데. 영원히 다른 차원으로 떠나버린 김, 보지 않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간극은 저수지의 검은 얼굴처럼 끝 간 데 없다.

내가 결혼한 후 김이 보내 준 축하카드를 본다. 김이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온 마지막 물건이다. 문구점에서 흔히 파는 기성카드지만 페이지를 펼치면 김이 손수 그린 그림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농촌풍경인데 여백을 흰 꽃이 핀 감자밭으로 채워 들여다보면 가슴이 푸근해진다. 처음 이 카드를 받았을 때, 그의 절망이 녹아든 듯한 시퍼런 들판이 어찌나 시리던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들여다보는 그림에선 평온함만 느껴진다.

내 마음이 몰래 붙들고 있던 김을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아 카드를 저수지 위로 힘껏 던져보지만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물가에 떨어진다. 펜으로 그린 그림이 물에 번지는 것이 어둑한 시야에서도 보인다. 김이 품었던 순수한 열망과 호미로 그린 들판이 천천히 저수지에 수장되고 있다. 억겁의 시간 속에선 김이나 나나 반딧불이처럼 한 점의 순간을 살다 가는 것 것뿐일 텐데. 어떤 밤, 고단한 생활이 그의 정신을 흔들지라도 손바닥만 한 종이에 그림을 그렸을 김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 순간이 바로 김이 우주의 한 점으로 발갛게 발광하는 순간 아니었을까. 그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우주의 한 귀퉁이가 조용한 축제처럼 환하게 밝혀지리라.

어느새 반딧불이는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개구리 소리만 또렷하게 내 정신을 깨운다. 내가 돌아간 후에도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반딧불이의 춤은 밤마다 계속될 것이다. 보는 이 하나 없다 해도, 하나의 삶이 찬란하게 피었다 지는 모습이 물 위에, 이 사위에 그리고 우주의 한편에 새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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