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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제2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 대상

 

 

영덕 블루로드를 끼고 달리다, 장사리 어디쯤에서 서쪽으로 굽어 돈다. 여느 시골처럼, 한적한 길을 쭉 달리니 동대산 아래다. 영덕 남정면과 포항 죽장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동대산은 내연산 삼지봉 북쪽 능선에 솟은 해발 791m의 봉우리로, 바데산을 지나 북으로 뻗어 간다. 군데군데 원시림의 골짜기와 개울이 시원하게 흘러가고, 아담한 소(沼)와 폭포는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동대산 동쪽 들머리 쟁바우 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 두 바위가 서로 싸울 듯 마주 보고 있다 하여 '쟁바우 마을(쟁암爭岩 마을)'로 불린다. 내가 쟁암마을을 찾았을 땐, 식목일을 이틀 지난, 농번기였다. 과수목엔 꽃들이 절정이고, 막 새순을 올린 두릅은 연했다. 아낙들은 밭 기슭에 매달려 두릅을 꺾거나, 길게 고랑을 낸 밭에 감자 씨눈을 넣느라 분주했다.

이른 아침, 마을에 도착한 나는 들에 나가는 촌로에게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절터에 대해. "어째 알고 여까지 오셨소?" 나는 이 마을을 찾은 이유에 대해 촌로에게 설명했다. "우리 마을엔 절터가 두 군데 있었다고 들었어요. 한 군데는 저기 마을 입구 저수지 둑 아래고, 또 한 군데는 마을 위, 큰골이라는 곳이라오. 쭉 올라가면 길 끄트머리에 소나무가 많은 마당 너른 집이 나오는데, 그 집에 가서 물어보소. 잘 알려 줄 거라오."

쟁암 길을 따라 오르니 오른쪽에 너른 평탄지가 펼쳐졌다. '속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아래 평탄지는 모두 밭으로 일구어져 있었다. 부락민들은 이 들을 '속들'이라 불렀다. 속들을 지나 마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큰골(절골)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가쟁이 골로 이어졌다.

큰골 쪽으로 쭉 올라가 차를 세우고 발품을 팔았다. 산바람이 불어 오르는 길이 수월했다. 어느 정도 올랐을까. 너른 잔디밭이 펼쳐지고, 군데군데 키 작은 소나무와 바위가 자리를 튼 아름다운 집이 나타났다. 마당 안 건물은 모두 3채로 별천지에 온 듯 묘한 기운이 들었다. 인기척에 사방을 살피니 잔디밭 한편에서 소나무를 손질하는 어르신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나는 얼른 인사를 올렸다. 어떻게 왔느냐는 물음에 늘 그렇듯 '절터' 이야기를 꺼냈다. 잊히고 묻힌 과거의 땅을 찾고 있다고. "들어와요, 들어와" 의외의 친절에 어리둥절하지만, 골짜기에서 만나는 촌로들의 친절은 믿을만한 것이어서 의심은 접어두었다. "그 참 희한한 일도 다 있구려. 젊은 사람이 뭣 하러 그런 험한델 댕기고 그래요?" 그러면서도 낯선 객이 반가운지, 환한 얼굴로 본채를 지나, 가장 위에 자리 잡은 별채로 나를 안내했다. "옛날에 여기가 절터였어요. 부처를 모신 암자 자린데, 내가 별채를 얹었다오. 옛날 어른들 말씀에 여기 부처가 산다고 해서 '부처담(부처가 사는 연못)'이라고 했다고 해요. 이 뒤 벼랑은 담불이 많아 '선다물', 그리고 부처담 앞쪽으로는 전부 논밭이었다고 해서 '절앞들', 또, 저쪽 옆 비탈을 '절두빈달(절머리 비탈)'이라 했어요. 스님 백 명 넘도록 기거하는 아주 큰 절이었다고 해요" 별채는 '부처담'이 있었다는 말에 걸맞게 절앞 들이 훤히 내다보이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전부 다랑이논이었어요. 아직도 이 근처에는 기와가 나와요" 어르신은 나를 마당 한 편에 놓인 돌확과 기와 조각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잊히고 묻힌 곳의 흔적을 확인하고 나니 또 하나의 과거를 만난 듯 반가웠다.

집 오른 편으로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이 동네서 우리 집이 있는 곳을 '물바우골'이라고도 해요. 아주 옛날에는 이 계곡이 지금처럼 옆으로 흐른 게 아니라, 집 마당을 가로질렀다고 해요. 그런데 큰 홍수가 나서 물길이 산기슭 쪽으로 바뀌었고, 그때 절이 휩쓸려 갔다고 해요. 홍수 후로, 물길이 지금처럼 산기슭 쪽으로 바뀌었다 해요. 저 아래엔 '용추소(沼)'라는 곳이 있어요. 옛날에 용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곳에 소牛를 매 놓으면 용이 나타나서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잡아먹었다고 해요. 그 얘기를 우리는 철떡 같이 믿고 컸어요. 그 소(沼)가 얼마나 깊었는지 명주실 끝에 돌을 매달아 빠뜨려 보면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록 끝이 없었다는 거예요."

어르신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생경하고 생소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기서 쭉 내려가면 마을 입구에 속곡지라는 저수지가 있어요. 제방 건너 산기슭에 작은 암바위가 있는데 부처가 새겨져 있고, 작은 돌부처가 하나 서 있어요. 거기도 옛날 절터였다고 해요. 그 맞은편엔 커다란 바우가 두 개 있어요. '쟁바우'라고 하는데, 그 아래 바우에 한자가 새겨져 있어요."

어르신이 일러준 대로 속곡지로 향했다. 둑 방에 서서 건너편 산기슭을 살폈다. 헐벗었던 나무에 연둣빛 새순이 돋아 시야를 가렸다. 한참을 둘러봐도 두서없는 암바위와 나무뿐이었다. 잘못 찾은 듯 불안함이 스쳤다. 그때, 가파른 산기슭 아래 자그마한 석축이 보였다. 석축 위에 두 쪽의 암바위가 있고, 가운데 하얀 기둥 같은 것이 보였다. 건너가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제방 위로 건너자니 물이 흘러 위험하고, 둑 방을 내려가자니 찔레와 잡풀이 무성하고, 경사도 심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둑 방을 내려간다 해도, 물길 사이에 놓인 바위가 두서없이 흩어져 여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둑 방을 내려가는 동안 몸의 중심이 자꾸만 앞으로 쏠려 굴러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간신이 둑 방을 내려갔다. 물길을 건너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사히 물을 건너고 나니 눈앞에 가파른 산기슭이 나타났다. 앞이 캄캄했다.갈수록 태산이란 말,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나뭇가지와 나무뿌리에 의지해 간신히 기어오르니, 두 발 딛고 설 만한 자리가 나타났다. 그제야 숨을 골랐다.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험하여 등골이 서늘했다.

반원 모양의 석축 안으로 들어섰다. 두어 명 겨우 들어설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옛날에 쌓은 것이라기보다 근래에 쌓은 느낌이 강했다. 아직도 기도처로 사용되는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인기척마저 느껴졌다. 미륵불과 마애불은 석축 안, 남쪽을 향해 서 있었다. 두 쪽의 자연 바위는 앞으로 살짝 기운 듯, 안쪽으로 모아졌다. 마애불과 미륵불을 본 순간 섬 해서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양각된 곳곳마다 누런 석태가 휘덮었다. 마애불과 미륵불 모두 얼굴 쪽이 심했다. 살점이 문드러진 모습 같다고 해야 할까.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아쉬움을 더했다.

간간이 드러난 음각된 곡선으로 대략의 형체를 짚었다. 마애불은 두 개의 암바위 오른쪽에 새겨졌다. 양각의 깊이가 얕아 마치 선각 같았다. 1m도 채 안 되는 높이로, 목 아래에서부터 다리까지 법의의 주름이 희미하지만 섬세하게 살아있었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말아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아래로 향했으나 마모가 심해 정확한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얼굴 역시 마모와 석태가 심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고, 얼굴 뒤로는 동그란 광배를 표현했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보인다는 어떤 이의 견해가 있으나, 내가 보기엔 신라시대 작품에 가까웠다. 경주 남산에 표현된 마애불들과 표현기법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미륵불로 불리는 석상은, 부처라기보다 상투를 한 벅수다. 1m도 채 안 되는 크기에, 전체적으로 두루뭉술하게 깎아 투박하기까지 하다. 역시 마모가 심했다. 굵고 긴 눈썹을 표현했고, 눈썹과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 심술궂고 화가 난 모습이었다. 벅수는, 우리 조상을 닮았다기보다 중국의 왕이나 장수들의 흉악망측한 모습에 가깝다. 잡귀나 유행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가정과 나를 보호받고자 생겨난 믿음 같은 존재가 벅수다. 마을 사람들에겐 미륵불로 불리고 있지만 쟁암리 석상은 분명한 벅수다. 크기가 작아 도난이 염려되는 것은 나 혼자만의 걱정일까. 하루빨리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전체적인 지형으로 볼 때, 이곳엔 절이 있었다고 할 만큼의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석축은 마애불과 미륵불을 위해 쌓은 것이고, 골짜기 아래 평탄지가 보이긴 하나, 한 칸 초가조차 올릴 공간도 안 돼 보였다. 이곳은 절터라기보다, 기도 터였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마을 어귀, 접근이 좋은 길목에 불상을 세우고 기도처를 마련했다. 그리고 질곡의 삶을 벗어나 평안을 염원했다. 어쩌면 이곳은 정성과 치성을 드리면 효험을 보는 산신당이나 용왕당, 또는 아들을 염원하던 기자암(祈子巖)이었을 것이다.

마애불과 벅수 곁엔 근래에 쌓았는지 1m 남짓한 돌탑 2기가 있었다. 이곳은 종교를 품은 절터라고 하기엔 어색함이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직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과학이나 의술로도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치유하며 오늘까지 살게 한 근원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거창한 이름도 아니요, 유능한 과학이나 의술도 아닌, 우리의 삶 주변에 자리한 바위, 나무, 돌이 아니었을까.

건너편을 바라보니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다. 어르신이 일러준 쟁바우다. 싸울 듯했다는 기세는 없고 서로 나란히, 그저 평화롭다. 보는 사람에 따라 싸울 기세로, 때로는 평화로운 친구나 형제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이 마을의 이름이 된 '쟁바우'는 막 속곡지를 흘러나와 고요히 아랫마을로 흘러가는 봉전천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쟁암리 마애불(우측)과 벅수.

 



◆ 당선소감 - 박시윤 씨 "떠도는 것 숨통을 조율하는 일… 신선한 충격이자 중독"

겁 없이 돌아다녔다.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중심'이라 친다면, 그곳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나갔다. 떠돌았다. 목적할 곳도, 목적할 이유도 없이. 그것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숨통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온종일 쏘다니다 돌아왔을 땐, 먼 곳의 흙들이 따라와 고단할 것도 없는 걸음들을 위로했다. 그것은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고, 중독이었다. 일상이 무료해질 무렵, 신발 아래 웅크린 흙들이 나를 불러댔다. 그럴 때면 그들을 구실 삼아 먼 곳, 더 먼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낯선 이야기들이 와글거릴 때면 그들의 말을 주워 심연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의 말이 제법 몸뚱어리를 부풀리면 지면 가득 이야기를 토해냈다. 내가 해야 할 숙명인 것처럼. 이젠 그것이 떠남의 이유가 충분히 되지 않을까 싶다.

영덕, 푸른 바다를 벗어나 발길 낯선 구석으로 숨어든 것도 이런 이유였다. 낯선 객에게 차를 내어 대접하며, 긴 이야기를 쏟아놓던 촌로와, 그의 구전을 빌려 벅수를 찾아냈을 때의 벅참은 신선한 인연이었다. 험준한 산기슭에서 지금도 누군가의 애환을 달래고자 서 있는 벅수와 마애불을 보았을 때의 애틋함, 그리고 어떤 위안. 나는 무척 거칠게 감동했고, 또는 섬 했고, 또는 험하게 남겨진 현재의 무관심을 두 눈으로 목도하며 안타까워했다.

글이 거칠다. 거칠고 투박한 모습으로 오늘을 지키고 있는 벅수와 마애불을 대하는 내 예의라고 말하고 싶다. 굳이 예쁘거나 거창한 문장으로 포장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경북의 이야기를 듣고자 공모전을 열어준 경북신문과, 투박한 글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눈여겨 봐주신 심사위원들께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인다.

 



◆ 심사평 - "낯선 마을 탐사형식으로 잘 써내려… 구체적 서술 돋보였다"

여행기의 구성과 문장의 독창성과 여행경험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봤다. 여행지에서 자기경험과 자기고백, 자기감정, 자기충동을 솔직히 드러낸 것에 많은 점수를 주었다. 여행 장소와 여행지에서 사건과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표현 했는가를 보고, 문장의 아름다움보다 자기 문장이 있는 여행기를 자기 스스로 얻은 문장을 높이 샀다.

대신에 남의 글을 많이 인용한 것은 가능하면 낮은 점수를 주었다. 문장에 넋두리가 많은 것도 가능하면 제외했다. 관찰 없이 건성건성 스케치한 것, 여행지의 겉모습만 대강 살피고 지나간 것도 제외했다. 최종적으로는 지역을 어느 정도 안배했음도 밝힌다.

가장 부합한 작품이 박시윤의 '영덕 쟁바우마을 쟁암리사터 벅수를 만나다'였다. 이 여행기의 대상지는 우리가 잘 아는 경주나 안동이 아니고, 영덕의 쟁바우마을이라는 낯선 마을이고 그것을 탐사형식으로 잘 썼다. 여행지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돋보였다. 여행 태도와 기록방식이 좋았다.

금상자 2명의 작품 가운데 이세은의 '안동에서 애국소녀 되다'는 문장이 활달하고 잘 읽혔다. 드라마에서 과거를 유추하는 감각도 돋보였다. 예천을 여행하고 쓴 박종순의 '문리버 삼수정'의 도입부는 자기만의 경험을 아름다움 문장으로 꾸밀 줄 안다. 자기만의 경험을 문장으로 잘 구성할 줄 안다.

은상의 학창시절 가출하듯 경주를 여행한 경험을 쓴 황예리의 '가출을 했다'는 자기고백과 의외성이 돋보인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문학성도 있고 재미있게 읽힌다. 이은진의 '경북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도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경북 지역을 돌아보는 공간감이 좋다.

모두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최세균·이상호·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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