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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행복의 미학 / 문윤정

부흐고비 2020. 9. 26. 21:24

환승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낀 40대 초반의 남자가 내 옆에 와서 섰다.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모를 정도로 땟국물이 흘렀다. 한눈에 걸인이거나 노숙자로 보였다. 나는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안경을 벗으면서 “내가 무섭습니까?” 하고 물었다.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물음엔 간절한 무엇이 있었다. 봉변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감추고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무섭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너무나 불행하다면서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행복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한마디했다. 그는 “아줌마는 참 행복해 보여요.”라고 말한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행복이란 단어만큼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저마다 다르게 규정하고 느끼는 것이 행복감이다. 지구의 인구가 70억이라면 70억 개의 행복이 존재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의 삶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가 아니며, 노숙자가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은 얼마나 행복을 느끼는지 궁금증을 가진 그는 아직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가끔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스 철학자를 비롯하여 현자들은 행복을 최고의 선善이라고 했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행복해야 한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행복을 느끼려 애쓸 뿐이다. 행복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노숙자와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행복하기를 기도할게요.”

“기도를 해주려면 지금 내 앞에서 해줘요.”

생각지도 않은 그의 말에 멈칫했다. 그는 한 그릇의 밥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기도를 구하고 있다. 나는 약속 시간이 걱정되었지만, 전철을 한 대 보내고, 그와 함께 의자에 앉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의 간절함이 느껴져 뿌리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배낭여행할 때가 생각난다. 교통사고로 도로 위에 함부로 너부러져 있는 주검을 보았다. 인도에서 저렇게 나도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힌두교 신전에 들어가서 ‘나의 여행이 무사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사제 앞에 섰다. 이마에 성수를 뿌리는 기도행렬에 서기도 했다. 어두운 밤에 갠지스강물에 등불을 띄우고 사제로부터 안전을 기원하는 축복을 받았다. 그때는 불안한 마음에 위안이 된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을 받으면 내가 무사할 것만 같았다. 이런 기도 덕분인지 한 달 동안 무사히 인도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노숙자가 되기까지 고단했을 그의 삶을 상상했다. 누가 패배자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에서 밀어낸 것일까? 스스로가 패배자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한때는 있다. 그에게도 눈부시게 빛나는 행복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출근했을 시절도 있었을 것이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 혹은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그가 왜 집을 떠나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의 과거를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나는 기도를 위해 그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말할 때 그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이름을 지어줄 때 희망에 부푼 부모님의 그 마음을 떠올리는 것일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줄 사람도, 불러줄 사람도 없음에 자괴감이 밀려오는 것일까?

“어디에서든지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등 뒤에는 나를 생각하는 사람, 나에게 연민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태양이 모두를 밝게 비춰주듯이 나에게도 희망의 빛이 있음을 기억하세요….”

걸인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나의 기도가 끝났는데도 그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가 눈을 뜨고 고개를 들 때까지 기도를 했다. 남을 위해 기도를 해본 적이 없기에 진땀이 났다. 나의 진실한 기도가 자칫 자괴감과 분노를 일으킬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의 기도로 위안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기도로 위안을 얻었을지언정 그것은 금방 사라지고 말 한 줌의 햇빛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의 최고 목표는 행복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우리의 행위는 행복을 향하고 있다.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마실 때, 감미로운 바람에 내 몸을 맡길 때, 갖고 싶은 물건을 가졌을 때 이런 소박하고도 순간적인 행복이 있다. 또 오랫동안 준비해온 시험에 합격했을 때, 집을 마련하고 자동차를 가지게 되었을 때 느끼는 행복은 지속적으로 행복을 준다.

어떤 행복이든 유효기간이 존재한다. 행복의 유효기간이 우리를 갈증 나게 만들고 끊임없이 갈망하게 만든다. 인간은 끝없이 갈망한다. 한 수행자가 “재벌이 회사를 걱정하는 것이나, 걸인이 한 그릇의 밥을 걱정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갈망하고 걱정하는 목록만 다를 뿐, 갈망의 뿌리는 같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들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얇은 유리벽과 같다. 밟고 있는 그 자리가 단단하고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다. 유리벽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의 존재는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이다.

노숙자가 눈을 뜨고 고맙다고 말했다. 나의 기도가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 밤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헤맬 것이며, 어디서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증오하고 있을 그, 삶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그에게 기도가 힘이 될까?

우리는 필연의 존재가 아니라 우연의 존재로 이 세상에 던져졌다.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하는 그런 숙명을 지닌 존재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정한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면 누구나 고난이 따른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사는지 모른다. 남들이 사는 만큼은 살아내야 한다고 자신을 곧추세우려는 노력은 눈물겹다.

가난하지만 한 잔의 물에 행복을 섞으면 단맛이 나고, 한 그릇의 밥과 소박한 찬에도 행복을 섞으면 근사한 식탁이 될 수 있으며, 빛바랜 옷이지만 자존감을 더하면 빛나는 옷으로 변할 수 있음이 행복의 미학이다. 남들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해도 내가 희망과 용기를 지니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님을 그는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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