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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부추꽃 / 박금아

부흐고비 2020. 9. 26. 21:38

오늘은 꼭 그를 만나러 가야 했다.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한참 울리도록 응답이 없었다.

"이 번호는 사용하지 않는 전화이오니….

불안한 생각이 밀려왔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초조하게 안부를 물었다. 중환자실 간호사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환자의 상태를 묻고 조심스레 꽃을 좀 가져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시간을 끌기에 '오늘도 안 되겠구나.'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괜찮다는 대답이 왔다. 절대로 안 된다더니…. 의아했다.

이제는 먹거리를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 만복집 굴짬뽕만 찾더니 한 달 전에는 꽃을 갖다 달라고 했다. 오랜 병원생활을 한 그가 병실에 꽃 반입이 금지된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병원 측의 거절에 차일피일 하다가 그만 부탁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침 베란다에 핀 부추꽃 화분을 쇼핑백에 담아 들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처음 그를 만난 곳은 영등포역 뒤편 공터에서였다. 노숙인들을 위한 밥차가 오는 날을 빼고는 낮에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후미진 곳이었다. 그즈음 나는 매일 그곳을 거쳐 인근의 무료병원으로 봉사를 다녔다. 요셉의원이라는 곳이었다. 빈 터에는 오래 전에 집을 나온 듯한 가재도구들과 수명을 다한 차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노숙인들은 그 사이에서 처분만을 기다리는 폐차들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고물더미에서 부서져 내린 녹은 땅과 땅 위의 것들을 다 붉게 만들었다. '길거리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산화酸化된 상처가 붉은 녹의 빛깔로 떨어져 내렸다.

해질녘이면 살풍경이 더 했다. 취기가 오른 노숙인들은 노을빛 속에서 자주 패악을 부렸다. 진흙 밭에 빠져버린 타이어 바퀴처럼, 스스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인생이었다. 세상을 향한 주먹질이었을까. 해넘이께면 그들은 수렁 속에서 본능처럼 사지를 버둥거렸다. 가끔씩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헛발질 소리에 더 깊어지는 공허였다. 파출소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순찰중'일 뿐이었다.

볕이 내리는 소리 뿐, 칠월의 공터는 적막이었다. 노숙인들은 땅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가 뙤약볕에 말라붙은 곤충의 애벌레 같았다. 숨결이라고는 없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부추꽃만이 누렇게 시든 잎 사이로 몇 송이 꽃을 가난하게 피워 올리며 서글픈 생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사람 역시 살아 있는 이래야 단 한 사람, 그 뿐이었지 싶다. 그는 무리들 속에서 떨어져 나와 공터 도린곁에서 늘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붉은 흙더미 속에서 저 혼자 푸른 목을 빼어 올리며 피어나는 부추꽃 같았다. 코 밑에 난 탑삭나룻은 야릇하게도 당알진 생기를 풍겼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은 요셉의원 현관에서였다. 문을 열었을 때 한 눈에 알아보았다. 말초신경 비대증으로 지나치게 돌출된 눈과 입술, 하얗게 변해버린 왼쪽 눈은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를 기억하게 했다. 그는 그 병원의 경비원이 되어 있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무의탁 환자들에게 진료순서를 정해 주는 일로 그는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날이면 내 방으로 우편물을 전해주러 왔다가는 화병에 꽂힌 꽃을 몇 송이씩 빼어들고 가서는 현관에 꽂아두곤 했다.

누군가 공터에 피어 있던 부추꽃을 소주병에 담아 왔던 날이었다. 돌심보처럼 굳게 닫혀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꽃!'이라는 말이 새어나왔다. 싸움소리 대신, 처음으로 조곤조곤한 말들이 오갔던 것 같다. 그날엔 그도 밤이 늦도록 꽃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고향집을 떠나왔다고 했다. 마당에 부추꽃이 하얗게 피어나던 날이었단다. 그는 눈자위가 붉어졌다. 여러 형제가 있었지만 타고난 장애 탓에 마음을 닫고 외톨이로 살았다고 했다. 객지에서는 사람이 더욱 그리웠지만 번번이 외면당했다. 돈을 벌면 마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돈 되는 일이라면 나쁜 일도 마다 않고 뜬벌이를 했다. 과연, 돈을 벌고 나니 사람이 다가왔다. 여자도 생겼다. 금세 마음을 주었고,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돈을 챙겨 도망쳤다. 다시 혼자가 되었고 방황 끝에 병을 얻었다.

폭설이 내린 어느 해 겨울, 은인을 만났다. 혜화동 지하철 역사에 쓰러져 있던 날이었다. 요셉의원에서 봉사하는 의사였다. 병원을 소개받고 문 앞까지 갔지만 발길을 돌렸다. 길거리에는 처지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근처 시설에서 밥도 주었다. 자연스레 '길거리 사람'이 되어 살던 이듬해 어느 날, 그 의사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끌려오다시피 병원으로 왔다. 치료를 받으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봉사하고 싶다고 하자 경비 일이 주어졌고, 병이 악화되어 큰 병원으로 떠나던 날까지 성실한 문지기로 살았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독실로 옮겨져 있었다. 복도 맨 끝 방,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한 눈에도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가가서 이름을 불렀다. 손을 잡아도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처음 그를 만나 악수를 청했을 때, 여자 손은 처음이라며 얼굴을 붉히던 일이 떠올랐다. 병원으로 오기 전, 간호사가 꽃을 가져올 수 있도록 허락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소용없게 된 꽃을 들고 뒤늦게야 찾아 온 나를 누군가 질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무심했던 마음을 만회해 볼 셈이었을까. 쇼핑 백 속의 화분을 보며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꽃을 건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삶과 죽음의 문턱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꽃을 내밀다니, 잔인한 생각이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화분을 그에게로 가져가고 있었다. 진땀이 났다. 어느새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자리에 화분을 놓고 이렇게 말해버렸다.

"형제님, 부추꽃이 참 예쁘게 피었지요? 꽃 가져다 달라고 떼쓰시더니…."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런데 기적이었을 게다. 딱 한 번 그의 눈길이 꽃을 향했던 것은. 아주 짧은 시간, 가느다랗게 감긴 눈꺼풀이 부추꽃 꽃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순간, 뭉클한 안도의 느낌이 나를 감쌌다.

휘익, 한줄기 저녁바람이 지나간다. 뜨거웠던 여름날, 해 진 공터에 불던 흙바람 냄새가 난다. 그도 지금 영등포 공터에 피어나던 부추꽃을 볼 수 있으려나? 칠월이면 부추꽃이 하얗게 피어났다던 고향집 마당을 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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