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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편지 / 오세윤

부흐고비 2020. 9. 29. 10:31

첫눈에, 그녀였다. 처녀 때 그대로의 가냘픈 몸피, 짧게 커트한 곱슬머리, 일자 눈썹 밑에 맑게 반짝이는 눈. 40년 세월은 간데온데없었다. 또박또박 걷던 걸음을 드티며 그녀가 누군가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눈을 빛내며 조바심하듯 찾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순간, 직감으로 다가섰다. 뒤를 따라 오감이 진동자처럼 떨렸다.

식대를 지불하느라 일행 뒤에 처져 식당 안에 남아있던 나는, 숨이 멎었다.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손끝 하나 까딱 못하고 서서 앞 유리창을 통해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래오래 바라고 기다리며 꿈꾸던 유연한 해후의 순간이 바로 지금임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와락 달려나가고 싶은 건 마음뿐 몸은 바위덩이라도 된 듯 움직여 주질 않았다. 목이 탔다.

피하듯 얼굴 마주치는 일 없이 40년 세월을 보내고는 있어도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사이라 그녀와 나는 서로의 근황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동창 홈피와 분기마다 나오는 회보, 그리고 입들을 통해 동기들 모두의 행동반경과 생활상은 남우세스러울 정도로 낱낱이 서로에게 자세히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 동네에 산다는 것을 내가 진즉 알고 있듯, 매주 월요일마다 이곳 고교 동창회 건물 강의실에서 동창들과 함께 두 해째 중국 고전을 수강하고 있다는 따위 나의 동정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한 번 더 저만치 멀어진 내 일행들의 면면을 미진한 듯 살피고 나서 서름하게 몸을 돌렸다. 그들 속에 내가 있지 않은 걸 의아해 하는,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돌아서며 가볍게 비트적하는가 싶던 몸을 바로 추슬러 세우고 오던 골목길을 또박또박 다시 걸어 올라갔다.

그녀의 남편이 도량이 넓고 그녀처럼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들이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집 안 가득 갖가지 기화요초를 키우며 아름답게 산다는 이야기가, 이야기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튀어 올라 귓속을 윙윙 먹먹하게 울려 댔다. 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인 J의 친정어머니 상사에 문상 갔던 열두 해 전의 그날처럼 가슴이 다시 또 막막하게 흐려왔다.

6월초 쯤이던 문상하던 날, 지하철역을 나와 빈소가 있는 W아파트까지 가는 내내 나는 사위스럽게도 고인을 추모한다기보다 ‘그녀와 마주치는’ 것만을 열심히 생각했었다. 빈소에 먼저 와서 앉아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길에서 오다가다 마주칠지도 몰라. 만일 없다 해도 한 서너 시간 죽치고 앉아 있으면 틀림없이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초여름의 풍성한 가로수 잎들도, 푸르른 하늘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자연스러운 척 만날 기회가 이보다 더 좋을 때가 있을까 보냐며 시간까지 꼼꼼히 계산하여 주부들이 한가하게 나들이하기 좋을 2시로 잡았었다. 아파트로 가는 멀지 않은 길을 아주 느릿느릿 걸었다. 하지만 빈소에 도착하기까지 그녀와 마주치는 요행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빈소에도, 거실과 방 둘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하는 내 속을 눈치 챈 J가 과일과 음료를 가지고 곁에 와 앉으며 넌지시 그녀가 다녀갔음을 말해 줬다. 30분쯤 됐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한동안, 행여 그녀가 앉았다 갔을 구석 쪽 자리에 상기 흐릿한 음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헛되이 더듬다 아쉽게 상가를 나왔다. 집으로 오는 내내 나의 망막에는 검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었을 다소곳한 그녀의 영상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불과 십여 분의 차이, 속절없이 사라진 두 번째의 기회였다.

첫 번째 기회는 그보다 8년 전에 있었다. 인천에서 개원하고 있던 나는 해마다 열리는 연말 동창회 모임에는 거의 참석을 못 했다. 40 중반, 마침 그해의 동창회는 주말에 열렸다. 모처럼 만에 나도 참석할 수 있었다. 식이 시작되고 얼마쯤 지났을 때, 평소 보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 K가 곁에 와 앉으며 넌지시 그녀의 참석을 알려 줬다. 하지만 나는 감히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단상만 주시하며 회의에 열중하는 듯 가장하여 자글대는 속을 숨겼다. 모임이 끝나 흘낏 그쪽을 살폈을 때는 이미 그녀의 테이블은 텅 빈 뒤였다. 다음날 전해들은 이야기는 더 아프게 가슴을 찔러 댔다.

홀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굳어졌다고 했다. 모임 내내 말을 잃고 앉았던 모습이 보기 딱했던 곁의 친구들이 식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를 호위하듯 감싸 서둘러 홀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생각없이 모임에 나타나 미안했노란 가슴속 혼자 하는 말 한마디가 어찌 위로가 될까. 그 뒤로 그녀는 동창회에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보는 순간 온통 넋을 빼앗긴 고교 독서 모임에서의 첫 상면, 가을의 관악산행, 두물머리 강변 나들이, 대학 1년 겨울방학 중 눈 나리는 늦은 저녁의 첫방문과 그녀의 정성스럽고 깔끔하던 상차림, 식구들과 함께 하던 저녁 식사, 여름 방학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정릉 골짜기로의 데이트.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상대를 배려하고 뜻을 거스르지 않던 그녀의 온순함.

낙엽 쌓인 창덕궁 뜰, 더운 입김에 발갛게 볼을 물들이며 선 그 아이의 눈동자는 그대로 높푸른 가을 하늘이었다. 구름 옅게 흐르던 투명한 눈동자를, 시간이 정지된 순간이 지나고 눈을 떴을 때, 온통 하늘빛 너른 호수가 되어 있던 고궁의 가을 뜰을, 몇 숨이 지나서야 환영 속에 부용정과 나무들이 제 모습으로 나타나던 그 선열(禪悅)의 순간을 내 어찌……. 하지만, 어이없고 어리석은 나의 실수로 뜰은 저물고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아, 운명의 짓궂음이라니.

해마다 두 번은 꼭, 나는 어김없이 창덕궁을 찾는다. 대조전 뒤뜰 매화 몽우리 지는 2월과 조락의 11월, 부용지 물가로 그녀의 붉게 물들던 볼을 그려 고궁 나들이를 한다.

표지 누렇게 바랜 『묘법연화경』, 갈피에 끼워 둔 편지를 꺼내 든다. 양면괘지에 쓴 부치지 못한 편지, 사진 한 장. 낙선재로 내려서는 길목, 영산홍 가득 핀 화단 앞에 그녀가 여전한 모습으로 서서 잔잔하게 웃고 있다. 그녀의 조용한 행복이 가슴을 적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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