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생生의 소리 / 박민지

부흐고비 2020. 9. 29. 10:29

작년 이맘때 봄바람이 사그라질 즈음,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의사는 노환으로 인한 신경 쇠약이라고 했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듯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발을 헛디뎌 쓰러질 때 엉덩이뼈를 다치셨습니다. 뇌를 다친 것도 아닌데 기력과 기억을 점점 잃어 가셨습니다. 다른 신체 기능도 도미노처럼 삐걱삐걱 쓰러져 갔습니다. 나는 그것이 여든아홉 생을 보내는 자연의 순리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움직이지 못하시더니, 두 명 밖에 안 되는 자식 이름을 잊고, 먹는 것마저 줄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가셨고,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도 나는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요양원은 지나치게 깔끔해서 갈 때마다 낯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6인실 병실에 계셨습니다. 병실에는 저마다의 삶을 살다 모이신 노인분들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거나 누워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깊이 잠드셨습니다. 표정이 어찌나 아득한지,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은 앙상하고, 눈은 쪼그라든 버찌처럼 작아졌습니다. 무성한 코털은 아무도 건드린 적 없는 비무장 지대처럼 바람이 나고 드는 대로 흔들렸습니다. 푹 꺼져서 벌어진 입속은 깊고 검었습니다.

뼈마디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메마른 손, 호스를 따라 침대 밑에 고여 있는 오줌, 그리고 오줌통 옆에 놓인 틀니를 봤습니다. 유리컵 물속에서 출렁하며 나를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하필이면 왜 틀니를 오줌통 옆에 놔두셨는지, 할머니가 야속했습니다.

틀니와의 추억은 2년 전, 부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며 대학교를 다니던 때였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틀니 소리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밥상을 차려 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나는 끼니때마다 밥과 반찬을 따로 담아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에서 혼자 나물을 비벼 먹고, 고등어를 뜯으며 사계절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늘 내가 방문을 닫은 뒤에야 부엌으로 나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셨고, 발소리에 앞서 틀니 소리로 자신을 알렸습니다. 뜨걱뜨걱……. 부엌에서 홀로 질펀한 밥알을 오래도록 씹어 삼키셨습니다.

나는 틀니 소리가 방 안까지 들어오면 귀를 막았습니다. 덜컥대는 소리가 계속되면 음악 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빵을 드셔도 틀니는 쉬지 않고 뜨걱뜨걱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 끼를 다 드시는 데 40분이 걸렸습니다. 나는 방 안에서 시간을 재며, 종이에 틀니 소리가 식욕을 떨어뜨린다고 휘갈겼습니다. 틀니를 내동댕이치고 싶었습니다.

음식을 드실 때마다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친구를 만나면 가십거리로 떠들고, 틀니가 좋은 글감이 될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뜨걱뜨걱……. 내 몸 어딘가에 박힌 소리가 뒤늦게 욱신거렸습니다. 철없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틀니는 내 발 아래서 제명을 다한 듯 멈춰 있었습니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생을 그토록 뜨겁게 받쳤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는 그 어떤 소리도 낼 자격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틀니를 똑바로 바라봤습니다. 할아버지가 늦바람 피우다 할머니에게 들켜 역전에서 멱살 잡혔을 때 앙다물었던 저것, 할머니의 모진 잔소리에도 꿋꿋이 담배 연기를 머금었던 저것, 한겨울 골목에서 넘어져 동사할 뻔했을 때 달달 떨며 마지막까지 생을 붙잡았을 저것. 나는 한 번만 더 할아버지의 생을 붙잡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가족의 기도와 할머니의 정성, 나의 간절함이 통했을까요. 요즘 할아버지는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계십니다. 이제는 틀니를 끼고 식사도 하십니다. 햇살 좋은 날,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온몸으로 생을 울리는 그 쩌렁쩌렁한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한 존재 / 이희승  (0) 2020.09.29
편지 / 오세윤  (0) 2020.09.29
가릉빈가의 미소 / 김병락  (0) 2020.09.29
동목 / 이영숙  (0) 2020.09.27
부추꽃 / 박금아  (0) 2020.09.2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