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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발톱 깎기 / 최민자

부흐고비 2020. 10. 8. 08:49

발톱 깎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분주한 일상, 발톱 깎는 시간만큼 오롯한 시간도 없다. 바람은 고요의 바닥을 훼치고, 창밖엔 어린 별들이 글썽거린다. 기다릴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는 저녁, 신경은 발톱 끝에 집중되어 있다. 적막한 공간에 파종되는 소리, 소리들....... 무슨 씨앗 같기도 하고 섬세한 금은세공품 같기도 한 파적破寂의 음향이 시간의 고즈넉한 결 위에 미세한 족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손톱은 몇 주에 한 번 깎고 발톱은 몇 달에 한 번 깎는다. 손톱이 발톱보다 빨리 자라는 건 손가락이 발가락보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 던 시인의 통찰이 백번 옳다. 냄새나는 양말 속에서, 음습한 신발 속에서, 깜깜한 이불 속에서 발톱은 야금야금, 마디게 자란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각화된 편린들을 조심스럽게 쓸어 모은다. 조금 전까지는 나의 일부였으되 이제는 나와 무관해진 것들. 버림받은 것들은 매양 날카롭다. 그것들은 이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지구 어느 모퉁이에 내려앉아 소리도 없이 풍화되어 갈 것이다. 저를 버리고 돌아앉은 인정머리 없는 몸뚱이를 이따금 한 번씩은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정갈해진 발톱 위에 초록빛 페디큐어를 정성스럽게 바른다. 몸의 가장 낮은 변방, 숨죽이고 사는 것들도 가끔은 이렇듯 애초롬한 순간이 있어야 견디리. 반짝반짝, 발톱들이 빛난다. 땅 끝 마을 지붕 위 초록별들이 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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