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부고(訃告) / 최호

부흐고비 2020. 10. 12. 11:43

찢어진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죽음을 알리는 소리다. 무거운 소식인데 빠르게 날아온다. 이번 부고는 뜻밖이다.

「대전고등학교 동문 김○○ 심장마비로 사망 충남대병원 장례식장」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식을 접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이 가물가물한 탓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는 이름인데. 칠백 명이 넘는 동기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

물어물어 알아낸 건 죽은 동기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것 외에 공유할 기록이 없다. 딱히 모른 체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동기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난감했다. 얼마의 틈에서 고민했다. 소식을 자주 나누는 친구들과 연락 끝에 30여년 만에 동창들 얼굴이나 보자는 명목으로 문상에 나섰다.

사람은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걸 잘해야 한다. 헤어짐의 완성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의 화두는 죽음으로 옮겨간다.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을 일방적으로 맞는 것은 당혹스럽다.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난 고등학교 동기처럼 젊은 가장의 죽음이 그랬다.

형식적인 조문이었으나 영정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나와 같은 나이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로 조문객을 맞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위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막연한 미래의 사건이라 회피하기보다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하게 발생할 사건에 대해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삶이 선물이라면, 부고는 그 선물을 반납하는 절차인 셈이다. 지난여름, 미국 일간지 시애틀타임즈에 실린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를 쓴 사람은 바로 제인 로터 자신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쓴 부고는 ‘이 아름다운 날, 여기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을 담아, 제인’으로 끝난다. 이 여인처럼 자신을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이가 적을수록 죽음에 둔감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충격은 늘 존재한다. 십대의 한 때를 함께 보냈던 친구들은 어느새 중년이다. 이번에 죽은 동기 말고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몇 명 더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늦은 부고다.

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시장 할머니의 부고도 늦게 도착했다. 동네 사람치고 송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장에서 나오는 종이상자를 모아 팔았고, 언제부터인지 시장의 종이는 모두 할머니 차지였다. 자식이 있는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국수 한 그릇에도 헛돈 든다고 떠신 양반이 웬일인지 흰 쌀밥 한 번 먹어야겠다고 햅쌀 반 되를 사가더래요. 그날이 입동 다음날이었다는데, 바가지에 씻은 살이 그대로 있었대요.”

퇴근길에 세탁소를 들렀을 때 들은 부고였다. 평소에 국수 먹는 돈도 아까워하던 분이 햅쌀 반 되를 구입한 것은 스스로 알린 부고였을까.

신문은 날마다 부고를 알린다. 누군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죽음은 떠나는 것일까, 지나가는 것일까. 생사가 갈리는 순간, 부고가 시작된다.

고등학교 동기들도 나도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한다. 죽음은 다음 계절을 예약하지 않는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밤, 안녕이란 말에 담긴 중의적 표현이 새삼스럽다. 친구들의 걱정이 유가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누군가는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는 그 소식에 응답하는 것이다. 일생을 사는 동안 주변사람들에게 알리는 소식이 한 사람의 역사라면, 결국 삶은 서사(敍事)다.

술잔을 비우는 내내 친구들은 고인을 되뇌었다. 젊은 가장의 죽음과 시장 송 할머니의 죽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은 부고를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죽음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술잔은 느리게 비워지고 빈자리가 늘어났다. 탁자에 술잔을 채워놓고 떠난 친구들은 마지막 잔을 고인의 몫으로 남겨둔 것일까. 나는 왜 부고를 접할 때마다 서툴게 아파야 했나.

휴대전화에 저장된 부고를 다시 천천히 읽어본다. 유명인사가 아니기에 오비추어리(Obituary)처럼 누군가 대신 부고를 써놓지도 않을 터, 예약할 수 없는 소식을 내가 미리 써두는 것은 어떨까. 최근 들어 통념을 깨고 자신의 부고를 미리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옛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써두곤 했다는데, 죽음을 미리 헤아리는 것 또한 남은 삶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친구들이 명함을 건네며 다음에 한번 보자는 말을 한다. 대부분 형식이란 걸 안다. 하지만 살아서든 죽어서든 부고를 받고 재회할 것이다. 인연은 매순간 찾아오지만 모두 같은 거리에 있지는 않다.

나는 되도록 말을 아낀 채 죽은 동기보다 내게 닥쳐올 죽음을 오래 생각했다. 심중의 언어는 타인이 읽지 못한다. 잔이 채워지면 병은 비워지게 마련이다. 고인을 위해 마지막 잔을 채웠다.

함께 간 친구들을 따라 일어섰다. 잠시 빈소에 멈춰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망자를 보았다. 영정 속 그가 웃고 있다.

친구야, 나는 너를 잘 모른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이제 그만 쉬어라. 이 땅에서 고생했다.

고인의 생애에 인색한 부고 대신 살아온 삶을 되짚어 알리는 부고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보름 달빛을 끌고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은 내가 보지 못하는 길로 다닌다. 보이지 않아도 길이 있다. 그 길의 끝에 대문처럼 우뚝 서 있는 부고 통지서. 죽음은 언제나 궁금하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경 나루터의 기적 / 서상  (0) 2020.10.13
군불을 지피며 / 정원정  (0) 2020.10.12
발밤발밤 옛 돌담길 / 박채현  (0) 2020.10.12
속도 / 최민자  (0) 2020.10.08
욕망의 순서 / 최민자  (0) 2020.10.0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