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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개경 나루터의 기적 / 서상

부흐고비 2020. 10. 13. 09:05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강물은 개경포에 이르러 긴 숨을 고른다. 철석, 철석, 연둣빛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강둑 포구를 살짝 때리고 가기도 한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적막한 낙동강의 해 질 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이 나루터에서 일어났던 전설적인 이야기가 수면 위로 여울져간다.

조선 초(1398년) 봄, 한적하던 고령 개경포에는 때 아닌 시끌벅적한 소리로 강마을은 부산했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고을 원님도 행차하고, 승려, 구경나온 포구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소달구지까지 동원되어 줄지어 서 있다. 길 한쪽에는 조선팔도에서 오늘의 이 행사를 참관하러 온 의관을 갖춘 선비들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이운 행사에 육신 공양을 하기 위해 모인 건장한 남정네와 아녀자들도 긴장과 설렘의 빛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낙동강에서 개경포로 가물가물 줄지어 서 있는 조운선을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다.

선두에 선 배 한 척이 먼저 포구에 닿는다. 배 위에는 의문의 궤짝들이 각지게 실려 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꿩의 깃을 꽂은 의장대장의 나팔소리가 개경포구 하늘가에 요란히 울려 퍼진다. 이어서 애틋한 피리 소리가 중생의 영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산과 강으로 긴 꼬리를 흔들며 퍼져나간다. 그러자 하얀 고깔과 긴 장삼 자락에 붉은 가사를 두른 승려들은 북을 치고, 나비춤을 춘다. ‘휘리릭휘리릭’ ‘챙’ 바라춤을 추며 흥을 북돋우는 승려가 가장 관심을 받는다. 그들의 영혼을 울리는 깊은 소리와 나풀거리는 춤사위는 새로운 하늘을 여는 듯 경건해 보인다. 저 멀리 윤슬처럼 길게 떠 있던 십여 척의 배들도 천천히 포구로 향해 들어온다.

드디어 배에서 신줏단지 다루듯 하선하는 검은 궤짝들, 그 비밀의 함에는 과연 무엇이 들었을까? 그들의 섬세한 손놀림은 보석함을 만지듯 조심스럽다. 고승의 독경 소리와 함께 궤짝의 문이 열리자, 하늘의 문이 열린 듯 궤짝 속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간다. 때맞춰 나팔소리, 피리소리, 금빛 바라가 공중을 휘날리고 나폴나폴 나비춤을 추며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심오한 글자가 새겨진 검은 목판이다. 고려문신 이규보가 ‘동국이상국집’에서 “이 나라를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불력(佛力)으로 막겠다”고 하듯 민족의 염원으로 오랜 각고 끝에 만들어낸 인류의 문화유산 바로 팔만대장경이 개경포구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옻칠한 네모난 목판을 하나, 둘 건네받은 사람들은 가슴에 안거나, 머리에 이고 혹은 등짐으로 지기도 한다. 저마다 가벼운 신음을 토한다. 짓누르는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불경을 새긴 경판을 자신의 몸과 하나로 밀착한다는 것은 극락왕생을 꿈꿔온 자들에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자, 국보 제32호 인류의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실은 조운선이 강화도를 출발하여 천 리 길 물길을 돌아 새로운 보금자리 가야산 해인사로 가기 위해 이곳 개경포에 당도한 모습은 하나의 종교행사를 뛰어넘어 신성한 민족의식이었다.

개경포에는 지금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조운선과 이운행렬의 조각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조각상은 차지만 그때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왕명을 받은 근엄한 관리를 필두로 승려, 이운에 참가한 남성과 여성 모두 보물보다 더 귀한 진리의 말씀을 한 아름 이고 지고 길을 떠나고 있는 행렬의 모습은 그저 성스럽기까지 하다.

들녘을 지나 개천을 건너 험한 고갯길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끝이 보이지 않을 긴 이운행렬. 아마도 그들은 금산재를 넘고 고령 낫질을 지나 해인사까지 백 리 길을 스님의 독경 따라 발이 부러 터지도록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부처를 따르는 제자들의 행렬이 이토록 간절했을까. 진리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저 푸른 산 고개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로 인간 띠를 이루었을 그날이 눈에 선하다.

개경포구에서 하류로 몇 굽이 내려가다 보면 내가 태어나 살던 고향마을이 있다. 어머니는 개경포 건너 대니산 아래에서 열여덟에 삼대독자 집에 시집와 우리 육 남매를 낳아 키우셨다. 쓰러져가는 가정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식을 위해 부족할 것 없이 다해 주었건만, 가실 때는 조그만 자신의 육신도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셨다. 그 시절 가마 타고 개경포를 건너 물 잘 담는 마을로 시집올 때의 어머니의 심정은 어쩌면 이운행렬 길만큼이나 멀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대장경판을 다듬고, 글 쓰고, 판각한 사람들, 그리고 이운행렬에 적극 동참한 그들은 진정 기적을 만든 사람들이었다. 신분은 미천하였으나 민족문화의 대 프로젝트에 가장 앞장섰던 선각자들. 그 숭고한 얼을 나는 오래된 포구 개경 나루터에서 보았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 한다면, 그 초석을 다진 이는 다름 아닌 그 시절 대장경을 만들고 그 안위를 지키려 깊은 산속으로 옮긴 사람들이리라. 그들의 혼불 어린 노고가 없었다면 인류 문화의 보고인 저 대장경을 지금 내 어찌 마주할 수 있었으리.

저녁 해가 설핏 기울자 강물은 넘실대며 가는 길을 재촉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은 수면 위를 날아가는 나비를 동무 삼아 천진난만하다.

 

 

당 선 소 감


오곡이 익어가는 너른 들녘을 바라보면 글을 쓰는 일도 농사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곡물이 자라듯 글도 정성을 다해서 쓰지 않으면 야생의 글과 다를 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은 우리들에게 수필을 통하여 글쓰기와 사고력도 길러주거니와 무엇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의 지평을 넓혀 주는데 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은 어제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듯이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모르고는 미래도 설계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이 떠오른다. 진실한 사고를 통하여 우리의 참모습을 찾자는 취지가 마음에 들어나는 언제나 이곳을 맴돌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 이맘때쯤이면 나를 설레게 하는 그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진정 기다리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북한산 자드락길을 걸으며 괜스레 대구가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이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기다림의 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전화기 저편에서나 문자 속에 박혀있는 ‘축하합니다’ 그 한마디에 농부의 힘든 피로가 씻기어지듯 온몸이 녹아내리는 쾌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정성을 다하지 못한 야성적 글에 무거운 찬사를 안겨준 대구일보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곳에 참여하는 많은 수필가들은 모두 자랑스러운 경북문화체험을 발굴하는 전사라 생각한다.

△교원문학상 △제5회 경북문화체험 금상 △제8회 경북문화체험 장려상 △은평백일장 시부문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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