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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군불을 지피며 / 정원정

부흐고비 2020. 10. 12. 13:07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조리 숨바꼭질을 했다. 그 위에 잗다란 지저깨비를 얼기설기 포개놓고, 장작개비를 마저 얹어놓는다. 불쏘시개로 신문지에 불을 댕겨 나무개비 사이에 집어넣으면 불이 화르르 옮겨 붙으며, 저 안쪽 방고래로 넘어가는 부넘기의 속살도, 방고래 초입의 넓은 구들장도 환히 보인다.

장작개비의 불길은 서로 엉켜 점점 세어져 기세 좋게 타들어 간다. 몸에 연기를 칭칭 감은 불길이 치받쳐 구들장 아래 골고래로 빨려가는 게 마치 큰 괴어(怪魚) 한 마리가 불덩이를 덥석덥석 삼키는 것 같다. 저렇게 삼켜진 불길은 시근담 사이사이에 얹혀 있는 구들장을 데워 줄 것이다. 그 뜨거운 불길을 양분으로 받아들인 구들은 하루가 다 지나도록 넉넉히 제 몸을 온기로 지탱한다.

세차게 타는 장작불이 어느 정도 사그라지는 동안 멍하니 불꽃을 보다 문뜩 지나온 생을 뒤돌아 볼 때도 있다. 만 가지 상념이 불길 따라 너울거리기도 한다. 불땀이 약해질 쯤에 장작개비를 부지깽이로 헤집고 그 위에 통 나무토막 몇 개를 더 얹어 놓으면. 저들끼리 시부저기로 불땀을 만들었다. 나는 이윽고 지하실 밖으로 나온다.

건물 바깥벽에 휘우듬히 서 있는 높은 굴뚝에선 그새 구들 안을 휘젓고 굴레를 벗어던진 연기가 허공으로 당싯당싯 퍼져나간다. 구들은 온기만 삼키고 남은 연기를 허섭스레기처럼 밖으로 내쫓는가 보다. 냇내가 코끝을 스친다. 유유히 사라지는 연기 저 너머에서 문득 지난 세월이 어린다. 나는 왜 끝내, 내 안의 시꺼메진 그을음을 연기로 날려버리지 못했을까? 꼬다케만 안고 안에서 삭히려고 발싸심했을까? 바람과 나무와 물과 흙, 그리고 사람의 훈훈한 향기가 가끔은 바람이 되어 하늘하늘 불어주었음에도 말이다.

인도의 대설산(大雪山)에 산다는 상상의 새 한고조(寒苦鳥)는 밤이 깊으면 추위에 떨며 어서 날이 새면 집을 지어야지 하며 울다가, 날이 밝으면 모두 다 잊고 “무상한 이 몸에 집을 지어 무엇 하리.”하기를 되풀이했다 한다. 무엇이나 다잡지 못한 채 어정뜨게 살아온 내 모습이 결국 한고조와 그다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삶의 행간마다 깨어 있고 싶었던 내 노력은 태부족이었나 보다. 퍼뜩 생각이 멈추고서야 연기 먼지 마신 콧속과 목안을 물을 머금어 헹구어낸다. 그제야 집안으로 들어가 일옷을 벗고 갈음옷으로 바꾸어 입는다.

한참을 지나, 불이 어느 정도 사위었을 성싶어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 아궁 안을 들여다본다. 이글거리던 잉걸불은 거의 사그라져 숯불만 남아 있다. 찬찬히 쇠판때기로 아궁이 문을 닫고 일을 끝낸다. 그렇게 활어 아가리 같은 아궁이에 불 음식만 잘 먹여주면 그 다음날까지도 구들방은 식지를 않았다. 가난한 옛 어머니들이 힘겹게 아기를 낳은 산방(産房)이 그나마 구들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난방구조를 고안한 조상님께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불을 가량없이 많이 지핀 날은 불목에는 눕지도 못할 만큼 방바닥이 뜨거웠다. 하지만 알맞게 데운 구들방에서 하룻밤 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나면 한결 몸도 가볍고 얼굴까지 새뽀얬다.

간밤의 아랫목을 만져본다. 이불 밑이 아직도 따스하다. 사람의 온기만큼이나……. 어느 혈연인들 밤낮없이 곁에서 이만큼 수발들어 주겠는가? 세상은 온통 셈 빠르게 이익을 추구하며 겉으로 보여주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데, 구들은 생색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몸을 뜨겁게 달구어 제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구들장은 겉보기엔 투깔스럽고 볼품없는 넙적돌이지만 참으로 속 깊은 사람의 순후한 품성을 닮았다.

동짓달 긴긴 밤이 찾아오는 해거름,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면 무슨 큰일이나 끝낸 것처럼 한결 홀가분했다. 저녁노을도 가뭇없이 내려앉고, 넓은 마당에 함박눈이라도 펑펑 쏟아질 때면 아궁이의 불땀을 더 단속을 했다. 어둑발이 퍼져 인기척마저 끊기고, 깊은 어둠이 깔려 사방에 적막이 깃들면 산동네 공기는 금방 싸늘해진다. 하지만 군불 땐 방안은 마치 아기 몸에서 풍기는 배냇냄새처럼 포근함이 감돌아 나 혼자가 아닌 듯 마냥 훈훈하기만 했다.

그러나 구들방이라 해서 다 드스운 것은 아니다. 내 먼 유년의 초가에서였다. 군불을 지필 때면 부뚜막의 아궁이 이맛돌 밖으로 검뿌연 연기가 수시로 솟았다. 방고래를 타고 굴뚝으로 나가야 할 더운 연기가 거꾸로 정지 쪽으로 매번 나왔다. 불을 요량 없이 마구 처때는 것도 아닌데 풍구질하듯 연기는 그렇게 처냈다. 땔감이 없어 생솔가지라도 지필 때면 어찌나 맵던지 눈물 콧물까지 찔끔거렸다. 고랫재가 막혀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니 뱃속이 덧이 난 구들방은 항상 냉골이었다. 연기는 제 갈 길을 못 찾아 정지의 천장에, 또 벽에 새카맣게 더께가 되어 묻어 있었다. 살강 밑 거미줄에도 통풍창 살에도 거무튀튀한 그을음은 여지없이 드레드레 붙어 있었다. 늘 방이 추워 마음까지도 옹송그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내 안에도 무형의 구들은 있었다. 온갖 사유와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가슴 속이었다. 때로 창가에 머물고 있는 환한 아침 햇살을 보면 불꽃처럼 은밀한 열정이 일렁였다. 창공의 흰 구름, 지저귀는 새의 노래, 첩첩 주름진 먼 산들이 내 존재감을 부추겼지만, 팍팍한 현실에선 가슴을 뚫고 나갈 출구는 먼 신기루처럼 아득했다. 고랫재가 막힌 구들에 마른 화목을 넣어준들 소용이 없듯이, 맨 날 알 수 없는 허기진 갈망과 아픔, 서러움과 막막함이 더뎅이가 되어 불김을 막고 있었으니 무엇인들 연소가 되었겠는가? 가슴에서만 불길은 일렁이다 말았다. 허나, 생의 환희를 꿈꾸며 생명의 경이를 품은 불씨야 어찌 제풀에 지쳐 사그라졌겠는가?

어느 시인이 말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 사람의 현존은 전(全) 생애의 존엄을 짊어지고 있다. 우주를 닮았다는 우리의 생은 분명 그저 주어진 게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불씨를 가슴에 안고 살아낸 한 생도 결코 시들할 수 없다.

내 안에 불길이고 싶었던 오래 묵은 염원들, 설령 부질없는 환상이었다 해도 내게는 세상없는 삶의 꿈꾸기였다. 세상살이에 진눈깨비 맞으며 시린 손 부비는 인연들과 아랫목의 온기 나누는 꽃불 같은 삶이 그리웠다. 이제껏 포기할 수 없었던 불씨를 꺼질세라 꾹꾹 눌러 가슴에 담아 둔다. 고향의 따스한 구들방 같은 의지처가 있다면, 이 세상에 찬바람과 함께 자국눈이 뿌려진들 무어 그리 춥기만 하겠는가? 여울져 오는 구들장의 온기를 가슴에 안고 살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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