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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 일요일이었다. 친구의 화실을 찾았다가 그와 함께 드라이브나 하려고 차를 세워둔 골목길로 들어섰다. 조금 전 화실로 들어설 때만 해도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져 사람들이 종종걸음쳤었는데, 어느새 비 그치고 길바닥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 문을 열려할 때 문득 나는 보았다. 바알간 석류 꽃잎 하나가 물기가 닦이지 않은 창유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쳐들어보니 차를 세워둔 2층집 담벼락 위로 석류꽃이 한창이었고, 자욱한 잎새에서 아직 간간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기 전 나는 이번엔 창유리 안쪽에서 비에 젖어 들러붙은 석류 꽃잎을 잠깐 보았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와이퍼를 작동시키자 바알간 꽃잎은 몇 번 창유리 이쪽저쪽으로 밀려다니다가 어느새 길바닥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날 그때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나는 비에 젖은 그 작은 석류 꽃잎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다. 오히려 나는 늘 그 작은 석류 꽃잎을 생각하려 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차를 몰고 오갈 때나 일과 사이 짬이 생길 때나 화장실에서나 잠자리에서나, 내 머릿속 어느 한 곳에 빈틈이 생길 때면 거의 언제나 나는 그날 내 차의 창유리에 혼곤히 잠들어 있다가 한순간 와이퍼의 거센 몸짓에 휩쓸려나간 바알간 석류 꽃잎을 생각해 왔다. 때로는 그 꽃잎이 차창 유리 안쪽에서 보았던 그 꽃잎을 향해 마른 입술을 내밀어보기도 한다. 혹은 차창 밖으로 휩쓸려가면서 내지르는 꽃잎의 마지막 비명을 듣기 위해 귀 기울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그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날 창유리 안쪽에서 꽃잎을 잠시 바라보았을 때처럼 지금 나는 마음속 그 꽃잎에게 다가갈 수 없고 말 걸 수 없다. 이를테면 마음속 그 꽃잎과 그 꽃잎을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판 같은 것이 있어서 어떤 청각 언어도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이 자기들을 해칠 것으로 생각해 달아나는 아내와 가족들을 힘겹게 부르면서 얼음판에서 버둥거리는 것과 같은 악몽적인 상황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들릴 리 없는 완전 밀폐된 유리병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은 어떤 극한에서 서성이는 대상들을 바라볼 때마다 드는 것이었다. 겨울 운동장 파인 웅덩이에 등을 대고 누운 빗물이나 도살장으로 실려 가는 트럭 위 늙은 소의 큰 눈….

그러나 사실은 어떤 극한에서 서성이는 대상들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위의 낯익은 사람이나 사물 가운데 어느 하나도 우리를 밀폐된 진공의 유리병 속으로 불러들이지 않는 것은 없다. 남의 말투를 빌리자면 심연 아닌 존재는 없다. 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날 저녁 소낙비로 닦인 차 유리창 위에 웅크리고 있던 석류 꽃잎은 겨울 차가운 빗물이나 도살장으로 가는 늙은 소의 큰 눈망울과 마찬가지로 심연이며, 꼭 같은 정도의 공포와 질식의 느낌을 나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저 던지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이미 공포와 질식 속에 던져져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공포와 질식의 느낌은,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시각 언어, 어쩌면 영원히 청각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비정한' 시각 언어로부터 오는 것이리라.

그날 투명한 유리창에 엎드려 있던 석류 꽃잎의 영상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수정란처럼, 혹은 겹겹이 에워싸인 장미의 속처럼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의미와 정보를 담고 있다. 돌려 말하자면 자석이 지나갈 때 책받침 위의 쇳가루들이 움직이듯이, 내 삶에 내장된 수많은 의미와 정보들은 그 꽃잎의 영상 아래서 막 깨어나려고 들썩인다. 그 영상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갓난아이 때부터 혹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내 삶의 전부가 움칠거리며 반응하는 것이다. 본시 그 반응은 몇 번의 손길에 발갛게 부풀어 오르는 유두(乳頭)나, 알칼리용액에 담그면 이내 청색으로 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민감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동 한번 걸려면 오만 진땀을 빼야 하는 낡은 경운기 같은 나에게 그 반응은 늘상 일어나지는 않으며, 그 효과 또한 그리 선명치 않다.

그러기에 나는 전보다 더 열심히 엄지손톱만한 그 석류 꽃잎에 대해 생각하려 애쓴다. 지금은 마음의 유리벽에 빗물을 머금고 달라붙은 석류 꽃잎은 테두리 없는 추억의 항아리에서 저를 닮은 몇 개의 영상들을 끌어올려 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언제라도 내가 꺼내볼 수 있는 다른 항아리 속에 두고 있다. 그 영상들 하나하나를 다시 꺼내 보면, 터져버린 빨간 고무풍선의 말려 비틀린 조각, 세면대 거울 앞 물에 젖은 분홍 화장지, 딸아이의 초경(初經, 어머니가 몹시 편찮으시던 날 아침 내가 엿들은 아내와 초등학생 딸아이의 대화), 대학 시절 봉천동 아니면 모래나 근처 여인숙에서 내 옆에 흐드러지게 자고 있던 술집 아가씨의 입술, 아주 가느다란 끈으로 이어진, 뭉치면 한 줌도 안 되는 붉은 팬티, 50사단 근처 도살장으로 실려가던 허연 돼지의 분홍빛 음부….

그 영상들은 한결같이 그날 내가 본 석류 꽃잎의 색깔 또는 모양과 닮은 점이 있다. 그것들이 대체로 성적인 의미를 아우르는 것은 꽃잎의 선정적인 붉음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훼손되고 버림받은 모습을 띠는 것은 와이퍼의 거센 작동에 씻겨 짓밟힐 꽃잎의 헐벗은 처지와 관계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 나는 빗물을 머금고 혼곤히 잠들어 기어코 일어날 줄 모르는 그 꽃잎의 한스런 모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끌어올린 기억 속 다른 영상들은 시멘트 바닥 일그러진 양은대야에 머리를 적시고 있는 여인, 돌 속에 긴 머리를 잠그고 엎드려 있는 로댕의 <다나이드>, 내 서가 위 액자 속에서 땀 흘리며 간구하는 흑인 여인, 연등처럼 곱게 떠 있던 여수 앞바다 스티로폼 부이의 행렬, 혹은 금박이 벗겨진 시계의 헐거운 줄, 기도하는 마리아의 긴 옷자락….

지난 6월 1일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작은 석류 꽃잎 주위로 그런 잡다한 영상들을 마치 화투패처럼 펼쳤다 거두었다 하면서 그것들 대다수를 하나로 꿰는 단단한 끈 같은 것은 없을까 고심해왔지만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것들은 고인을 안다는 것 외에 다른 공통점이 없는 문상객들과 흡사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서먹하고 낯설 뿐이다. 하지만 비교적 화해로운 관계 속에 그것들이 편안히 자리 잡을 때까지, 그날 비에 젖은 석류 꽃잎이 던지는 시각 언어는 이해 가능한 청각 언어로 번역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빈객들을 제대로 접대할 줄 모르는 얼띤 상주(喪主)나 다름없다. 나의 주변머리는 그날 이후 대학 노트의 지리멸렬한 메모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와이퍼가 움직이기 전 곤히 잠든 석류 꽃잎, 언젠가 그런 연애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빗물에 눈이 부어 얼굴 못 들던 소녀가 서울의대 뒤 벤치에 웅크리고 좀체로 일어나질 않던 밤이 있었던 것 같다 와이퍼가 움직이고 공중으로 튕겨나가는 꽃잎 십오 년 전, 이십 년 전 그런 연애를 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빨간 고무풍선 터진 자락 같다 화장실 좌변기에 말라붙은 핏자국 같다 한때는 팽팽했던 빨간 풍선, 스무 살의 세상은 부푼 꿈이었고 지금은 사타구니 가릴 꿈도 없다 지금은 빨간 고무풍선 터진 자락 위로 세상의 배가 부풀어 오른다 띵띵하게, 腹水가 차오른다 혹시 임신한 것일까? 그러나 세상은 입덧을 하지 않는다.

땅바닥에 떨어진 코피 자국 같다 와이퍼 바로 위 유리창에 들러붙은 석류 꽃잎, 차 안에서 내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줄도 모르고, 물에 젖어 아무 데나 던져놓은 붉은 속옷 같다 下血해도 표시 안 나는 붉은 팬티 같다 여인숙 냄새 나는 이불 걷어차며 돌아눕는 술집 아가씨 같다 빨면 더욱 붉어지는 얇은 입술 같다.

잘못 만들어진 종이비행기가 첫 동력이 떨어지자마자 이내 고꾸라지는 것처럼, 어떤 영상으로부터 출발했든 나의 글쓰기는 몇 행을 못 넘기고 좌초하고 만다. 이를테면 화투판에서 손에 쥔 패로 깔린 것을 따먹고 다시 제껴 깔린 것을 모아 와야 할 텐데, 칠 게 없어 손에 쥔 패를 내고 제낀 것까지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도대체 서로 다른 시간 공간에서 솟아오른 그 잡다한 영상들을 하나로 꿰겠다는 의도 자체가 불순한 것이 아닐까. 조금 전의 상갓집 비유를 다시 들면 고인이 살아나 문상객들을 불러 모은다 한들 그들의 서먹함과 불편함이 해소되겠는가. 그렇다면 차창 유리에 들러붙은 석류 꽃잎이라는 최초의 영상으로부터 나의 글쓰기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셈이다. 가스는 올라오는데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 지금 내 처지는 그와 다름없다.

대체 글쓰기의 어느 과정, 어느 부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지금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같은 맹목적 상황에서 나의 처지가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테니스 폼과 마찬가지로 문제없는 부분을 하자로 간주해 고쳐버린다면 정상적인 글쓰기로 돌아가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상책인 것처럼 진전 없는 글쓰기를 고수하면서 형편이 나아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대체 지금까지 내가 든 비유들이 나의 상황에 적합한 것일까. 하지만 모든 비유는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오해의 시작이다. 어떤 비유든 가미되고 치장된 억측일 뿐이며, 의도에 감염되지 않은 비유는 없다. 하지만 또한 비유 아닌 이해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마침내 '흑암' 아닌 '무명' 속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세상에 아무도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데 너의 글쓰기가 진전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너에게 있다. 너는 항변할 것이다. 글쓰기 외에 다른 관심이 없는 너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고. 하지만 글쓰기 외에 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잘못이라면? 글쓰기에 대한 과도한 의식이 글쓰기를 가로막는 근본 원인이라면? 기필코 한 건 올려야겠다는 철벽같은 각오와 집념이 어깨에 힘이 들게 하고 무리한 동작을 낳는다는 건 어느 스포츠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 아닌가. 어쩌면 나의 글쓰기는 애인의 배 위에서 사내로서의 구실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속절없이 시들어버리는 성기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럴 때 깨어나야 한다고, 일어서야 한다고 다짐하고 애원하고 협박하는 것은 신체의 무감각을 더욱 조장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 언제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글을 쓸 수 없을까, 그것들의 삶에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듯이 글쓰기를 의식하지 않는 글, 글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 오직 글쓰기의 현재진행형만이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는 없을까. 글도, 글쓰는 자도 없고 종이와 필기구의 거의 비물질적인 만남, 한없이 가벼운 성적 접촉만이 지속 되는 상태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그 상태에서는 지금처럼 이질적인 영상들을 무리하게 접합시키는 대신, 차례로 넘어지는 볼링핀처럼 혹은 차례로 일어나는 파도처럼 영상에 영상이 꼬리를 무는 참 부드러운 광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하나의 영상은 다음 영상을 낳는 자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는 낙원의 글쓰기, 글쓰기의 잃어버린 낙원일 뿐이다. 물에 뜬 갓난아이는 스스로 떠오르려 하지 않기에 뜰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글쓰기의 낙원은 모든 다른 낙원과 마찬가지로 유토피아, 즉 어디에도 없는 나라이다. 모든 낙원은 낙원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태어나고, 낙원에 대한 의식으로 인해 도달 불가능하다. 글쓰기에 다한 의식 역시 글쓰기를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모순으로 존재한다. 마치 이곳에서 저곳을 보게 하면서 동시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감을 가로막는 유리창처럼, 글쓰기에 대한 의식은 글쓰기의 주춧돌이면서 걸림돌이 된다. 글쓰기에 대한 의식은 완벽한 글쓰기를 꿈꾸게 하지만, 완벽한 글쓰기는 바로 글쓰기에 대한 의식 때문에 좌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없이 유리창을 얇게 깎아가는 것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듯이 (유리창이 없어지면 이곳 / 저곳은 함께 사라진다), 글쓰기에 대한 의식을 무한히 지워가는 일이 글쓰기로 다가가는 유일한 방도가 될 것이다. 적어도 논리상으로는 말이다.

확실한 것은 글쓰기에 대한 의식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지양하는 지식만이 '즐거운 지식'일 수 있듯이, 글쓰기를 배반하는 글쓰기, 글쓰기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글쓰기만이 즐거운 글쓰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정도는 글쓰기의 낙원에 얼마나 접근했는가를 가리키는 구체적 지표가 될 것이다. 글쓰기의 즐거움, 다시 말해 의식으로부터 글쓰기의 즐거운 일탈은 가령 자기를 유혹하는 여자와 감나무 아래서 일을 벌이다가 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감 주우러 갔다는, 그래서 머쓱해진 여자가 깊이 참회하게 되었다는, 어느 스님의 일화에 비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즐거운 일탈은 글쓰기에 대한 의식의 치열함의 증거이기도 하다. 두 마음 없이 스님이 감을 주우러 간 것은 여자와 벌이는 일에도 두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포함한, 글쓰기에 대한 나의 모든 의식은 애초의 석류 꽃잎의 영상으로 돌아온 이제 비록 폐지될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괄호 속에 묶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지금까지 내 머릿속은 글쓰기를 감시하는 위대한 작가들의 납골당에 지나지 않았으며, 글쓰기를 위해 축적해온 영상들은 나의 글쓰기를 지겨운 노역으로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 영상들이 결정적으로 폐기처분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시 불릴 순간을 위해 본래의 시간과 장소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하여 흠뻑 빗물을 머금고 창유리에 달라붙은 그 날의 석류 꽃잎 앞에 나는 두 마음 없이 다가선다. 이제 나는 시골 잔칫날 돼지 멱을 따고 그 아래 사발을 받쳐 붉은 피를 받듯이 석류 꽃잎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받아 적어야 할 것이다. 내 의식의 벌어진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방언이기도 한 그 말을. 어쩌면 이렇게 운을 뗄 수도 있으리라.

늦게 왔구나 발톱에 빨간 석류 꽃잎을 물들이고 너는 석류 꽃잎 빨간 발톱만 보여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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