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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의 의미 / 김시헌

부흐고비 2020. 10. 13. 14:28

꽃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대수롭지 않는 꽃도 밝고 예쁘게 보이고, 기분이 우울할 때는 많이 아름다운 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울로 꽉 차 있는 마음 안에 꽃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어떤 사람은 거처하는 방에 항상 꽃을 두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도 밤낮으로 항상 보고 있으면 심상해진다. 없다가 있어지면 새롭고, 있다가 없어지면 아쉽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나는 꽃병을 때때로 방에 갖다 놓는다. 새 꽃을 꽂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꽃이 곧 사람의 표정으로 보인다. 맑고 밝은 얼굴에 그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마주 앉는다. 그 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꽃을 꽂아 주었다면 어떠한 감정이 될까. 꽃의 빛깔, 꽃의 형태, 꽃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신이 된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꽃이 있다. 나는 어릴 때 도라지꽃을 좋아했다. 도라지 중에서도 흰 도라지꽃이 좋았다. 어릴 때였으니까 이유는 분간하지 못하고 어쨌든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농촌에서 살아온 나는 도라지꽃의 흰빛 모양 소박 단순한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20대의 중반 때 《실낙원(失樂園)의 별》이라는 소설을 탐독했다. 그 소설 속에 작은 제목으로 <칸나의 의욕>이라는 말이 나왔다. 칸나의 검붉은 빛깔 모양으로 강하게 상대편을 사랑한다는 표현의 제목이었다. 나는 그 내용에 무척 심취했다. 칸나의 붉은 색과 같이 불타는 사랑에 빠져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면의 소망일 뿐 그러한 상대가 있을 리도 없고 내게 불태울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럴수록 가두어 둔 소망이 안에서만 자라서 칸나의 꽃이 좋아졌다. 남의 집 화단에 핀 붉은 빛의 칸나를 만나면 그 앞에 서서 자글자글 끓는 것 같은 꽃을 보면서 마음대로 여인의 세계를 상상하기도 했다.

50대가 되고부터 꽃보다 잎이 더 좋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져 갔다. 꽃은 눈앞에서 황홀한 유혹을 하지만 며칠을 못 가서 시들어 버린다. 50대라면 어느덧 여인에게서 거리가 멀어져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몸짓과 표정과 빛깔이 한때를 황홀하게 움직이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인 동작일 뿐 모두 허상으로 보였다. 변색이 없고 항상 푸르며, 표정에도 유혹이 보이지 않는 나뭇잎이 훨씬 나의 마음을 끌었다. 그것은 늙어진 증좌이라고도 하겠지만 어떤 의미로는 성숙을 뜻하기도 했다. 수만 개의 잎을 달고 정정하게 서 있는 여름의 큰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 우주가 흔들거리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 만든 예술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여름의 무성한 나무는 한 곳도 나무랄 수 없는 완전의 예술품이다. 자연을 흔히 신(神)이 창조한 예술품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실감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꽃보다 잎이 더 좋다는 생각이 나의 바탕에 자리잡고부터의 기억이다.

어떤 사람은 입원한 사람을 문병 갈 때 꽃송이를 들고 간다. 환자의 머리맡에 가져간 꽃을 곱게 다듬어 꽂아 놓고 돌아간 뒤에 그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꽃을 가져온 사람의 마음이 꽃에 매달려 있다. 그냥 형식으로 예의를 갖춘 꽃이 아닐 때 꽃의 의미(意味)는 더욱 깊어진다. 오랫동안 병에 시달린 사람은 감정이 단순해진다. 사회와 단절된 방에서 오직 병과 싸우는 동안에 자기만을 생각하는 순수 상태가 된다. 그 마음에 비쳐지는 꽃의 의미는 평소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

나의 방에는 현재 막 봉오리를 터뜨리는 백합꽃 화분 하나가 있다. 다른 몇 개의 화분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며칠 전부터 방안으로 들여놓았다. 꽃봉오리가 점점 굵어져 왔기 때문이다. 백합은 잎 속에서 길다란 꽃줄기를 뽑아 올리고 그 끝에 큼직한 꽃을 달고 있다. 나는 아침의 출근 전 시간과 저녁의 돌아온 시간에 그 백합꽃을 바라본다. 그것은 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보고 귀여워할 줄만 알고 물 주고 가꿀 줄은 몰라요." 하는 말을 가끔 하던 아내는 화분 가꾸기에 취미가 많았다. 여러 개의 화분을 두고 시간이 생기면 어린아이 돌보듯 손질을 했다. 한 잎 한 잎 물로 닦아 주기도 하고 밖으로 들고 나가서 분갈이도 하고 남의 집에서 얻어 왔다면서 새끼 화초를 다른 분에 옮겨심기도 했다. 그 아내가 몇 달 전에 바람결처럼 세상을 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당황 속에서 갈 사람은 가고 말았다. 질병이 가게 만들었는지 창조주가 데려갔는지 분간조차 어렵다.

화분에 물 주는 일이 나에게 돌아왔다. 버려두기에는 나무의 생명이 소중하고 남에게 보내기에는 가꾸던 사람에게 미안한 생각이다. 서툰 몸짓으로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는 동안에 백합꽃이 입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먼 곳으로 간 아내를 새로 느낀다. 아내가 꽃으로 표정을 바꾸어서 나타난 것 같다. 늙은 얼굴이 꽃같이 젊어져서 화신을 한 것 같다.

이승과 저승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호롱불이 꺼졌을 때 안에 있는 기름과 심지는 그대로 남아서 다시 성냥을 그어 대면 불이 붙는다. 그런데 아내에게는 기름과 심지가 없다. 그어 댈 성냥의 마음은 있어도 붙여 볼 아무 것도 없다.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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