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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빈집 / 류재홍

부흐고비 2020. 10. 13. 13:50

녹슨 철문을 민다. ‘삐거덕’ 된소리를 낼 뿐 그만이다. 팔에 힘을 실어 밀어제치자 그제야 무거운 몸을 비켜선다.

마당은 그새 풀밭이 다 되었다. 인기척에 놀란 잡초들의 수런거림에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내가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자기들이 주인인 양 기세가 대단하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태어나는 질긴 목숨일진대, 두 달여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툇마루는 더욱 가관이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흙 부스러기들을 잔뜩 안고 있다. 올려다보니 천정 한쪽이 허물어져 흙덩이 몇이 또 떨어질 기세다. 민망하여 더이상 볼 수가 없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게야. 하기야 훈기도 없는 집에 무슨 낙으로 제 몫들을 하려고 들겠나. 살 비비며 눈 맞춤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생겨날 게 아닌가.

이들에게도 청춘은 있었을 터. 칠 남매가 복닥거리며 살던 때가 절정이었으리라. 눈물과 웃음이 적당히 버무려진 방과 황톳빛 툇마루는 언제나 반들반들 윤이 났었지. 하룬들 바람 잘 날 없었지만 그 또한 사는 재미라 여겼을 터이다. 비바람 눈보라에도 철옹성이었건만 세월의 무게는 어쩌지 못하는가. 허망한 심사를 털어내듯 툇마루의 먼지를 쓸어내린다. 물걸레질까지 하고나니 그제야 제 모습이 드러난다. 대청 문을 열자 곰팡이냄새가 맵싸하다. 내친김에 뒷문까지 열어젖힌다. 서늘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 바람도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빠끔히 열린 쪽문에서 뒤란이 손짓한다. 오늘따라 장독대가 유난히 넓어 보인다. 올망졸망 앉아있던 그 많은 독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오도 가도 못하는 큰 독 하나만 우두커니 서 있다. 정월 보름날 어머니가 정화수를 올려놓고 빌던 독이다. 군데군데 금이 가긴 했지만 아직도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때 어머니는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간구하셨을까. 제대로 된 효도 한번 못해 본 자식의 어리석은 의문이다.

뒤란은 장독대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장독대 옆 감나무와 아래채 사이에는 긴 나일론 끈이 매여 있었다. 딸 부잣집답게 그곳은 늘 비밀스런 빨래들이 펄럭이곤 했다. 어머니의 매서운 눈 때문에 바깥마당으로 나가지 못한 그것들은, 때마다 푹푹 삶겨지는 바람에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반짝거렸다.

하지만 지금 빨랫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매실나무 몇이 열매를 안고 있을 뿐이다. 사라진 것들은 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매번 짜증을 부리며 감당했던 그 빨래들이, 어느 날 꿈속에서 얼마나 눈부시게 다가오든지. 그 뿐만 아니다. 흔적만 남아있는 뒷간에 대한 추억은 지금도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 구실을 한다.

풋사랑을 여읜 아픔을 삭이며 몇 날을 끙끙대며 누워있을 때였다.

“니 참말로 죽을라 카나, 이게 뭐꼬?”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를 일으켜 세우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을사조약 후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쓴 유서를 내 식으로 개작한 글이 적혀 있었다. 어느 국사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낙서를 했던가 보다.

그때는 다 쓴 공책을 뒷간 휴지로 썼다. 어머니는 볼일을 보며 그 글을 읽다 허겁지겁 달려 나오셨을 것이다. 내색은 않아도 심상찮은 딸을 걱정하고 계셨음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관심은 따뜻한 솜이불이 되어 시린 가슴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묻으며 기어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이제 내가 정말로 유서를 써 놓고 죽는다해도 말려 줄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첫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먹먹해지던 그때의 나도 없다. 마음도 몸 따라 헐거워지는지, 사랑도 환희도 잊어버린 듯 무덤덤해진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이곳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빈집이 주는 적막함과 스산함은 어쩔 수 없지만, 무기력한 삶을 일깨워 주는데 여기만한 곳은 없을 듯하다. 삶이 기억으로 유지된다는 말이 있듯이 곳곳에 스며있는 젊은 날의 흔적들은, 나를 곧추세워주는 원천임에 틀림없다.

내가 이 집을 떠났듯 내 아이들도 하나둘 자리를 옮기고 있다. 정작 빈집이 되어가고 있는 나는 무엇으로 그들을 붙잡아 줄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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