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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침묵의 무덤 / 김태호

부흐고비 2020. 10. 26. 21:18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나는 지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어느 무덤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다. 비록 시골 밭둑 한구석에 자리한 초라한 무덤이지만, 그 어느 제왕의 거대하고 위엄찬 왕릉보다 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뜻매김을 해본다. 이 안에는 금은보화나 황금왕관 따위의 물질적 보물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유물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에 있는 언총은 사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내뱉는 ‘말(言)을 묻은 무덤’이다.

마을 어른의 말에 의하면 한대마을은 예전부터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문중들 서로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말썽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아 나섰다.

한편,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의 형세가 마치 개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해서 ‘주둥개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찾은 나그네가 산을 보고, 개가 짖어대는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을이 시끄럽다고 하여 그 방책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가 말한 대로 개 주둥이의 송곳니쯤 되는 마을 입구 논 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 세 개를 세우고, 개의 앞니쯤 되는 마을 길 입구에는 바위 두 개로 개가 짖지 못하도록 재갈 바위를 세웠다고 한다.

또 그동안 싸움의 발단이 된 말썽 많은 말들을 모아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준비하여, 지금까지 서로 해대던 악담들을 모조리 종이에 적어서, 그 항아리에 담고 주둥개산에 묻어 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뒤부터는 이 마을에 다툼이 없어지고 평온해져 지금까지 화목하게 잘 지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언총의 크기는 왕릉보다는 작고, 보통 무덤보다는 큰 장군 무덤 정도이다. 원래는 이보다 컸으나 주변 땅 주인이 야금야금 파고들어 밭을 일구는 바람에 무덤이 작아졌다고 한다. 지자체에서 세계적인 유적지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근처의 땅 주인이 땅을 팔지 않았기에 그대로 방치해서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이 ‘말 무덤’은 선조들의 뜻깊은 지혜가 담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유산이다. 수백 년 동안 시골 밭둑에 앉아서 말 많은 세상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침묵의 무덤인 셈이다. 다만, 이렇게 좋은 뜻의 유적이 후대에 와서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이 오히려 아이러니할 뿐이다.

법구경에서는 말로써 지은 죄를 ‘구업’이라고 한다. 업에는 선업과 악업이 있다. 악업 중에 제일 무거운 업이 구업이다. 천수경 첫머리에도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란 구절이 나온다. 입으로 지은 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 즉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이다. 이 진언을 세 번만 외면 그날 지은 구업을 없애 준다고 한다. 내가 남에게 가슴 아픈 말을 했다면 단단히 구업을 지은 것이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 때면 ‘정구업진언’을 세 번씩 외고 자면 소멸된다는 뜻일 게다. 그 옛날 어린 시절, 동무들과 소꿉놀이 하며 이 진언을 아무 뜻도 모르고 외던 그때를 추억하면 자다가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오래전 일이었다. 무심코 내가 던진 말 한마디가 그 친구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주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우연히 동기모임에 참석하여 신임회장을 추천하는 자리에서 몇몇 동기들과 나눈 이야기를 그 친구와 가깝게 지낸 동기가 내가 한 말을 고자질하여 오해를 하게 만든 사실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 친구가 잘못 전달하여 내가 단단히 구업을 짓게 된 것이다. 피해자는 그 소리를 듣고 오해하여 밤새도록 나를 원망하며 잠도 못 자고 이른 새벽에 전화로 화를 못 참아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내가 만약 그 당시에 ‘정구업진언’을 알았더라면 주문을 외며 구업이 소멸되기를 진언했었으리라! 그래서 요즈음 잠자리에 들 때면 가끔 이 진언을 세 번씩 외우고 잔다.

요즘 구업 중에 제일 큰 구업이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을 올리는 일이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악성 댓글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기사가 근래에 들어 자주 들리는 것이 마음 한쪽을 더 아리게 한다. 이런 취지로 좋은 댓글 달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요즘,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느니, 차라리 언총 항아리 속에 깊이 묻어두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칼로써 입은 상처는 시간이 가면 쉽게 아물지만, 말로써 입은 상처는 평생을 간다’는 말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요즘같이 험한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전 세계에서 단 한 곳밖에 없는 이 말 무덤을 좀 더 의미 있게 복원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키길 염원해 본다.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대마을에 묻힌 침묵의 무덤, ‘언총’이 세계인들에게 은총의 문화유산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문득 작자 미상의 옛시조 한 수가 생각나 조용히 읊조린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 말을 것이
남의 말 내가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수 상 소 감


금년 1월말, ‘코로나19’란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을 때 집밖을 나가지 못하고 6개월 동안 집콕하면서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으로 방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일이란 참으로 힘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은퇴 후 11년 차 글쓰기 공부한 것이 그 열매를 맺는 것 같아 행복하다. 처음에는 각종 공모전에 도전할 엄두도 못내는 ‘공포작가(공모전포기작가)’ 이었지만, 지금은 ‘공모작가’로 변신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르지만 죽는 날까지 글쓰기란 친구와 동행하고 싶다. 현재의 내 꿈은 이제까지 회갑과 고희에 책 2권을 내었다. 다행히 희수까지 산다면 자서전 한 권을 더 내어 3권의 책을 손자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이 있기까지 지도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경북 의성 출생 △대구교육대학교 졸업 △(전) 고령군 교육장 △2011년 제16회 ‘문장’지 신인상 수상 △21C 문인협회 이사 △(전) 청람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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