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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꽃 진 자리 / 장미옥

부흐고비 2020. 11. 16. 09:09

이른 아침, 뒤뜰에 하얀 꽃비가 내린다. 매화는 꽃 지는 모습마저 곱다. 꽃샘바람 냉기를 타고 나비처럼 허공에 유유하다 자늑자늑 땅으로 내려앉는다. 떠날 때를 알고 제 갈 길을 찾는 매화의 홀연한 발걸음이 마음 한 자락을 붙잡는다. 꽃잎인들 아픔이 없을까.

꽃잎들이 떠난 빈자리를 유심히 살핀다. 소중함은 가벼이 드러내지 앉는 법, 무시로 찾아드는 비바람의 궂은 심술에도 온 힘 다해 꼭꼭 부여잡고 있던 자리이다. 꽃잎 떠나는 날 비로소 잡고 있던 손 내려놓고 잠시 숨 고르는 겸손한 꽃. 화려함은 없지만 뽀얀 솜털 보송보송한 또 하나의 새 생명을 잉태할 그 곳이다.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여태껏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자리를 찬찬히 보고 또 살핀다. 빨갛게 멍든 꽃자리가 오늘은 눈물겹도록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로 다가온다.

어머니는 고된 남편 시집살이와 자식 뒷바라지로 바깥나들이 한 번 마음 편히 못 했다. 성내로 유학 보낸 아들 하숙집 방문이 아니면 초하루 기도가 집을 나설 수 있는 유일한 외출이었다. 이른 아침 댓돌 위에 어머니 고무신이 뽀얗게 세수하고 해바라기 하는 날이 초하루, 어머니가 절에 가는 날이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머리 참빗으로 곱게 단장하고 나설 땐 왜 내 어깨가 우쭐거리던지, 옥빛이 도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가 어린 내 눈에는 꼭 선녀만 같았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에게 다투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가정사로 크든 작든 언짢은 일이 있어도 절대 티격태격 말싸움으로까지 진전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 어머니의 속앓이로 끝이 났다. 아버지는 완고했다. 한 번 우기면 콩을 팥이라고 고집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콩이 팥이 아닌 줄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건 언제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말 없는 희생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아버지를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어머니에게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을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라면 그런 아버지를 먼저 여의고 남매를 고스란히 혼자 책임져야 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며칠 전, 지인의 딸 결혼식장에 갔었다. 딸을 보내는 아버지에게 모두가 하나같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보냈다. 새로 맞이하는 사위에게 딸의 손을 건네주는 지인의 눈에 만감이 교차했다. 평소 흔들림 없던 지인의 눈에 물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두어 발짝 떨어져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피해 축하객들 사이를 슬쩍 빠져나왔다. 문득 어머니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목이 메어왔다. ‘저것의 끈을 붙여놓고 가야 하는데……’

부모와 자식 사이도 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식이 꽃잎이라면 부모는 꽃 진 자리가 아닐까. 태어나고 성장하고, 헤어짐은 당연지사. 언제까지나 부모님 품 안에서 머무를 수는 없는 일. 떠날 때가 되어 떠나는 것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 출발을 의미하는 축복이다. 축복 속에 떠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리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박수를 받으면서 부모님 곁을 떠나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고 행복을 키워가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혼기가 꽉 찬 나이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의 길을 가겠노라고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보라던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외면하고 선택한 길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입회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어머니의 병실이었다. 병환으로 입원해 게시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돌아서던 날, 어머니는 환자복 바지 끈이 풀렸는지도 모른 채 병실 문을 나서는 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계셨다.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일까. 몸도 마음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나는 매화가 몇 번이나 지고 다시 떨어지던 어느 봄날, 결국 귀향을 선택했다. 어렵사리 허락했던 길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왔으니 가슴속에 남았을 선명한 못 자국 같은 아픔이야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남았다. 칠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물정 모르고 살아온 딸이 마주해야 할 만만치 않은 세상이 어찌 걱정스럽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떨리는 손 말없이 잡아주고 안아주신 분이 어머니셨다.

세상살이가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다시 아이들 앞에 서 있다. 나는 홀로서기에 성공했지만,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느 추운 겨울, 묵은 한 해 꽉꽉 채운 동짓달 그믐날에 시절 다한 꽃잎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오래 전 그날, 집 떠나던 딸을 보며 “그래 이래 가는 게냐?” 하던 그 자리에 이제는 내가 섰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 떠나시는 어머니를 붙들지 못하고 나도 그렇게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늘그막에 갑자기 찾아온 몹쓸 병, 치매를 만나 어머니는 밤마다 기억 속에 갇혀있는 막내딸을 찾아 헤매다 여러 차례 사고도 당하셨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병원에서도 내 눈을 붙잡고 “어서 가거라.” 하시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꽃잎이 떠나간 자리엔 또 하나의 생명이 자라고 있다. 입춘을 보낸 한적한 뜰 앞, 이른 아침에 만난 매화꽃 진자리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청청하게 들려온다. “애야, 너도 이젠 누군가의 꽃자리가 되어야지……”

오늘따라 살갗을 쓸고 가는 꽃샘바람이 허리를 감싸 안는 우리 반 꼬마 아이들의 손길처럼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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