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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윤장대 / 정미영

by 부흐고비 2020. 11. 17.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예천 용문사는 소백산의 깊은 품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의 지문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단풍나무 사이를 걸으며 생각의 깃을 세운다. 나직이 속살거리는 나무의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니, 어느새 회전문 앞이다.

합장한 채로 자운루를 올려다본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회담 장소로 호국불교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곳이다. 호국의 염원이 응집된 소리들을 내 마음속에 받아 적으며 대장전으로 향한다.

용문사에 도착하면 할머니는 곧장 대장전을 찾았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그 자체가 보물이다. 대장전 안에는 4개의 보물이 모셔져 있다. 손 회전식 경장인 윤장대 2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용문사에만 남아 있고, 목각후불탱,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목각탱화다.

법당에서 만나는 할머니의 얼굴은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서렸다. 다소곳이 걷는 모습은 근엄했다. 향을 피우고 꾸밈도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고 거듭 절을 했다. 할머니의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솟는 것일까? 오직 부처와 일체가 되려는 몸짓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연하다는 듯이 절을 했다.

길고 정성스러운 절이 끝나면, 불단 양옆에 놓인 윤장대를 돌렸다. 불교에서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을 윤장대라고 한다. 고려 명종 때 자엄스님이 글을 읽지 못하는 중생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에 이르고 소원성취하도록 안치했다. 경전을 몰라도 책장을 한 번 돌리면 일만 번의 다라니경을 읽은 공덕을 쌓게 된다. 귀중한 문화재이기에 훼손을 우려하여 요즘은 음력 3월3일과 음력 9월9일 두 번만 돌릴 수 있다.

윤장대는 전륜장이라고도 한다. 겹처마의 팔각지붕 형태에 치밀하게 짠 공포로 이루어진 다포계 양식으로, 8면의 각 면에 문을 하나씩 달았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꽃살문에는 8개의 다양한 꽃 조각이 장식되어 있는데, 꽃잎마다 아포리즘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저릿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윤장대는 마치 팔각목조건물을 축소하여 놓은 것 같다.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한 아랫부분은 낙양처럼 조각 장식을 하고, 한쪽 모서리에는 긴 손잡이를 마련하여 그것을 잡고 경장을 돌릴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지고 마모된 손잡이에는 할머니의 애절한 손길이 스며있다.

할머니가 용문사를 찾아온 이유는 윤장대를 돌리기 위해서였다.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할머니였다. 경전을 읽지 않고도 부처님께 공덕을 쌓고, 죄와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니, 각별하게 와 닿았다.

할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자식을 의지해 살았다. 그런데 육 남매 중 세 명의 자식을 먼저 앞세웠다. 맏이는 이십 대에 전쟁터에서, 둘째는 삼십 대에 병으로, 내 아버지는 사십 대 끝에 교통사고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목숨 같은 자식들이 단명했다며 통곡했다. 자식들의 죽음은 숨기고, 가리고 싶어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원망할 대상이라도 존재한다면 후회하더라도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텐데.

할머니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마주 대할 용기를 잃어갔다. 그래서인지 점점 타인 만나기를 꺼려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지 않으면 좋으련만. 할머니에게 이어지는 모든 관계의 줄 위에서 허둥대며 바투 다가서지 못했다.

상실감이 가슴 속에서 똬리를 틀고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자식들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을 가슴으로 삭이니 몸져눕는 날이 늘었다. 할머니의 조그만 등에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업고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더욱 윤장대를 의지해 돌렸다.

그러면 어느새 가슴 속에 서린 응어리가 풀렸다고 하셨다. 원망하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생활의 모든 번뇌와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단다. 영혼까지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니 의심하는 마음 없이 온몸으로 윤장대를 믿고 받아들였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서 할머니는 정성을 다해 빌었다. 할아버지와 세 아들이 극락에 가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원했다. 남은 자식들만이라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했다.

대장전 가득 향내가 자욱하다. 소신공양하는 향을 보니 숙연해지며, 자손을 위해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경내를 떠돌던 기원의 말들이 내 두 눈에 닿아 눈물방울로 맺혀 흘렀다.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하는 웅숭깊은 마음 탓에 내 가슴마저 촉촉하게 젖어든다.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 윤장대를 돌린다. 할머니에 대한 먹먹한 기억과 다정한 추억 인자들이 손잡이에 옹이처럼 내포되어 있는 것만 같다. 품새를 찬찬히 훑어보며 눈에 담고 있는데, 바람결에 목탁 소리가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부처님의 설법인 해조음이 들리는 듯해 두 눈 감고 합장한다.

 수 상 소 감


뒷산을 오릅니다. 가끔은 익숙한 길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산에서 길이 아닌 곳도 자꾸 걸으면 새로운 산길이 생겨나듯이 제 글도 자꾸 써나가면 언젠가는 나만의 오솔길이 만들어지겠지요. 여러 갈래의 오솔길이 마침내는 산 정상으로 이어지듯이 앞으로 내 삶이 진솔한 글쓰기를 향해 나아가길 바랍니다. 망각된 것은 호명할 수 없습니다. 문화유산에 담긴 깊은 울림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문화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그 답사의 길 위에 소담스러운 들꽃 한 송이가 피어나길 기도합니다.
부족하지만 어여쁘게 봐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경북문화를 알리는데 앞장서 주시는 대구일보에도 곡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포항소재문학상 최우수상 △호국보훈문예대상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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