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봄과 사랑과 청춘과 / 최민자

부흐고비 2020. 11. 19. 08:47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라고 누군가 말하였다. 예고도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 별안간 맞닥뜨리게 된다는 뜻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느닷없이 찾아드는 드라마틱한 사랑은 아닌 게 아니라 사고라 할만하다.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알 수 없는 운명의 휘둘림 속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들게 된다. 느닷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봄도 그렇게 사랑처럼 온다. 소매 끝을 붇잡는 겨울의 등쌀에 꽃망울이 주춤거려 올해는 봄이 좀 늦을 거라 하였다. 삼월 말인데도 춘설이 분분하여 겨울옷을 채 들여놓지 못했다. 겨우 며칠 햇살이 좋았던가.

꽃송이가 벙글고 꽃잎이 터지더니 사위는 온통 꽃구름 속이다. 팝콘이 터지듯 폭발해버린 봄, 근엄한 얼굴에 일순 번지는 파안대소처럼 갑자기 풀려버린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 들떠 보인다. 노란 개나리, 하얀 목련, 연보라 빛 라일락​….

겨우내 조신하게 처신을 하던 마당의 나무들이 온갖 색깔들을 요란하게 뿜어낸다. 왁자지껄한 생명의 향연, 절정을 향한 내달리기이다. 어디 그렇듯 아름다운 빛깔이 숨어 있었던가. 흑백 일색이던 세상이 며칠 사이 빛으로 가득차고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무채색의 살풍경을 순식간에 빛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봄과 사랑은 많이 닮아 있다. 활기와 희망과 설렘으로 다가오는 점에서조차 그 둘은 닮은꼴이다. 사랑이 예기치 않을 운명이라면 봄은 예정된 순리라는 점이 둘 사이의 다른 점일 뿐.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엄밀히 다르지는 않다. 노인들이 봄을 기다리듯이 젊은 사람들은 사랑을 기다린다. 예고 없이 일어나는 게 사랑이라지만 청춘 남녀의 가슴 밑바닥엔 언제나 저제나 하는, 막연한 기다림이 숨 쉬고 있다.

봄도 사랑도 기다리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다. 창밖이 아무리 화창해도 마음 문이 닫혀 있으면 어느 틈새로 봄이 올 것인가. 미풍이 대지를 일깨우듯 감추어진 여혼의 현을 퉁겨줄 긴긴 기다림이 있기에 사랑의 기적도 일어나는 것이다.

봄과 사랑이 함께 어우러지는 눈부시게 푸른 이름, 그것을 이름 하여 청춘이라 하지 않던가. 꽃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더니 어느새 봄이 뒤태를 보인다. 꿈속의 여인처럼 그림자도 안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려 한다.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닳아지고, 산화되고, 공중분해 되어버리는 우리네 젊음처럼, 사랑처럼.

봄은 짧다. 사랑도 짧다. 청춘 또한 그렇게 짧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콩나물이다 / 김희정  (0) 2020.11.20
귀뚜라미 / 변해명  (0) 2020.11.19
그날의 단상 희방사 / 조옥상  (0) 2020.11.19
별을 품은 그대 / 류창희  (0) 2020.11.18
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 김미숙  (0) 2020.11.18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