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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귀뚜라미 / 변해명

부흐고비 2020. 11. 19. 13:10

오늘 밤에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을도 깊어 밤이면 창문을 닫고 잠들 만큼 기후도 선선해졌는데, 그 귀뚜라미가 베란다 어느 구석에서 아니면 책장 뒤에 아직도 살고 있다면 가냘픈 울음소리라도 들려줄 것 같은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여름 책을 정리하다 책장 구석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 귀뚜라미를 발견하고 놀랍고 반가워 손안에 잡아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베란다로 뛰어나간 귀뚜라미는 이내 화분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그날 이후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부풀고, 올 가을에는 견고한 아파트 공간에서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 한 마리 귀뚜라미를 생각하며 그 뒤 두 달이나 아파트에 소독을 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바퀴벌레가 생긴데도 귀뚜라미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하긴 지금껏 숨어 살아온 귀뚜라미니 지금 소독을 한다 해도 죽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행여 약 기운에 죽어버릴까봐 마음이 쓰여서였다. 그렇건만 웬일인지 아직도 귀뚜라미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잠자리에 누워 행여 귀뚜라미 소리를 기다리노라면 나는 문득 산골 들판을 달리는 어린 소녀가 된다.

억새꽃처럼 손짓하며 나를 부르는 방낙안터 외갓집. 산초 향기 같은 그리움이 밴 사람들.

들깻잎을 씹으면 어린 시절 그곳에서 지켜보던 푸른 달밤과 귀뚜라미 소리가 떠오른다.

들국화를 꺾으면 풀숲 아득한 곳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 피어오르는 곁불에 콩깍지를 구워 먹노라면 울타리 호박꽃 밑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우리 자매는 등잔불에 두 손을 가져다 대고 미닫이에 그림자놀이를 했었다. 여우, 새 발, 허수아비…… 여러 모양을 만들며 즐기다 잠자리에 들면 봉창에 달빛이 우윳빛으로 쏟아지고 뒷곁 나뭇가지의 춤을 지켜보며 누웠노라면 섬돌 밑에서 귀뚜라미의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사랑채에서 퉁소 소리라도 들려오는 밤이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봉당에 내려서서 푸르게 깊어가는 가을밤을 지켜보곤 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퉁소 소리. 무거운 소리로 떨어지며 스산하게 구르는 오동잎 소리. 그 소리 밑에 깔려 현란하게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밤을 더욱더 깊게 느끼게 했다.

객지에 떠도는 사람에게 고향을 일깨워 주고 그리움을 달래 주고 기다림을 어루만져 주고 잠 못 이루는 이에게 위로를 주는 귀뚜라미 소리.

그 한 마리 귀뚜라미가 울어준다면 나는 옆집 아이들을 데려와 그림자놀이도 가르쳐주고 실뜨기도 가르쳐주며 귀뚜라미 울음을 듣게 하고 싶었는데…….

새벽마다 콘크리트 바닥을 플라스틱 비로 쓸어가는 허리 굽은 할아버지에게도, 딸의 구박에 시름겨워하며 파출부로 전전한 할머니에게도 고향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듯, 우리집 귀뚜라미 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었는데…… 귀뚜라미 소리는 지금껏 들리지 않고 있다.

혹시 혼자인 귀뚜라미도 외로워 노래를 잃은 것이 아닐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아파트 공간을 탈출하여 그리운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가버린 것인지.

하지만 나는 이 가을에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기다려보며 긴 밤 꿈을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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