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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여승女僧 / 안병태

부흐고비 2020. 11. 27. 15:30

생시 같은 꿈을 꾸기도 하고 꿈같은 생시를 겪기도 한다.

비구니와 속물, 신분이 다르고 남녀가 유별하나 질병에 승속이 따로 없다보니 민망한 동침을 할 때도 있다.

한의원 대기실, 무명초 부스스한 앳된 스님이 다소곳 눈을 내리깔고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절집에도 절집 나름의 전래요법이 있으련만, 어디가 얼마나 고통스럽길래 속세로 내려와 저렇게 동그마니 앉아있을까.

‘머리나 깎으려고’산으로 들어갔던 총각시절이 떠오른다. 불목하니 겸 공양주 겸 상좌 노릇 보름 동안 부처님 새벽공양을 연속으로 굶기다가 분기탱천한 스님에게 쫓겨나고 말았었다. 원수의 새벽잠을 생각하니 앞에 앉은 스님이 존경스럽다.

침구실에 같이 불려 들어갔다. 빨쪽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뽀얀 맨발이 보인다. 초등학생 계집애 마냥 발도 작다. 고슴도치가 된 스님과 내가 의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 커튼을 넘어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린다. 커튼 밑으로 법당 향내가 솔솔 넘어오는 것 같다. 통증을 참는 심호흡인가? 아파도 혼자, 서글퍼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절대 고독, 거기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연민인가? 이따금씩 호요- 한숨짓는 소리가 들린다. 무소뿔처럼 홀로 가야 할 구도의 길, 평생 잿빛 버선 속에 감추고 살아가야 할 저 발가락에다 불현듯 주홍빛 꽃물을 들여 주고 싶다. 문득 남산 어느 오막살이 토담아래 지천으로 피어있던 봉숭아꽃들이 보인다.

비구니와 속물, 신분이 다르고 남녀가 유별하나 지금 이 순간 이 방안엔 스님과 나, 둘 뿐이다. 얇은 천을 벽 삼아 눈만 가렸을 뿐 속옷 바람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오붓하게 누워있다. 이 기막힌 동침을 위해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을 만들었던가. 두루미와 우렁이? 다람쥐와 소나무? 어쩌면 후생에 연꽃과 바람쯤으로 다시 만나려고 이런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속세의 악취가 커튼 너머로 살금살금 기어 넘어가지 않기만 바랄 뿐, 여기에 더 무얼 바라리.

꿈인 양, 극락인 양 달짝지근한 반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침 뽑으러 들어온 의원이 밉다. 침은 왜 반시간만 꽂아둔단 말이냐. 세 시간, 네 시간, 시침시간이 길면 병도 빨리 나을 것을….

스님을 반듯하게 눕히고 꼼짝달싹 못하게 결박한 다음 아래위로 설렁설렁 흔들리기 시작하던 물리치료기가 나중엔 좌우로 세차게 요동친다. 속적삼 앞자락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석굴암 협시보살의 풍만한 돋을새김이 눈앞에서 일렁이는 것이다. 민망스럽고 눈부셔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물리치료사의 우악스런 폭행(?)에 죽는다고 고함지르는 나를 바라보며 스님이 웃었다. 내가 엄살 부리는 줄 알았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중생의 고통을 보았거든 측은지심을 불러낼 일이지 저렇게 터놓고 웃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더구나 스님이 저렇게 예쁜 보조개를 갖고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조신하게 승복을 고쳐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스님에게 내 태극선을 건네주었다. 합장한 채 담담한 눈동자를 보여주더니 말없이 돌아선다. 속물의 시각, 청각, 후각을 어지럽힌 한 시간, 설마 이 한 시간만으로 끝나버릴 인연일까. 심산계곡 오솔길이거나, 조그만 암자이거나 우연히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태극선이 걸린 승방 아랫목까지야 어이 넘보랴. 요사 툇마루에서나마 차 한 잔 얻어 마실 자투리인연은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바람 지나간 대숲인가. 기러기 건너간 연못인가. 스님 다녀간 한의원에 스님의 한숨소리, 스님의 그림자가 남아있을 리 없다. 맞은편 벽에 걸린 ‘금강산도‘ 속에 바랑 메고 지팡이 짚은 노승 하나가 헐떡헐떡 비로봉을 오르고 있을 뿐, 삼복 해거름의 한의원은 한산하다. 불현듯 얼토당토않은 저 노승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다 태극선을 할랑할랑 흔들며 속세를 벗어나고 있을 그 스님을 그려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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