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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귀를 후비며 / 정진권

부흐고비 2020. 11. 27. 08:42

사람이 귀가 가려우면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는 일이 있는데, 이는 결코 점잖은 모양은 못 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하는 일이니 용서하시기 바란다. 어느 날 갑자기 귀가 몹시 가렵기로 무의식 중에 나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끝이 가려운 데까지 닿지를 않아 퍽 짜증스러웠다. 그래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들여다보며 그 무능함을 심히 질책했다.

그러다가 문득 보니 성냥개비 한 개가 책상 위에 흘려 있었다. 나는 얼른 그걸 집어 귀를 후볐는데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과연 네로구나." 나는 이런 감탄을 발하며 한참 시원 삼매에 침잠했다. 아, 그런데 그 순간, 그 귀중한 성냥개비가 자끈동 부러지질 않는가. 나는 그 부러진 성냥개비를 창밖으로 홱 내던지면서, 아무짝에도 못 쓸 것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결국 나는 귀후비개를 찾기로 하고 서랍들을 뒤졌다. 필요치 않을 때는 눈에 잘 띄다가도 막상 필요해서 찾으려고 하면 안 보이는 것이 귀후비개, 손톱깎이 같은 것들이다. 쓰고 나서 같은 자리에 두면 아무 탈이 없는데, 늘 후회를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어떻든 여기저기 뒤지다 보니 귀후비개가 눈에 띄었다. 나는 상쾌한 한때를 즐기면서 귀후비개의 공로를 찬양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생각했다. 가려운 데까지 닿지 않는다고 타박받은 손가락이다. 그리고 성냥개비를 생각했다. 한참 시원할 때 요절해서 심히 욕을 먹은 성냥개비다. 나는 그때, 내가 그들을 타박하고 욕한 것이 정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참 쉬운 점 하나를 잊고 있었다. 손가락이나 성냥개비는 결코 귀를 후비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새끼손가락의 본래의 임무를 알지 못한다.(물론 귀를 후비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것이 없으면 성냥개비와 귀후비개를 태산만큼 가졌다 할지라도 나는 손가락 병신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성냥개비의 임무는 불을 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냥개비가 그 자신의 실수나 못남으로 하여 불을 일으키지 못할 때에만 나는 성냥개비를 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들에게 좀 미안스러웠다. 해서 나는 내 새끼손가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손가락 병신을 면케 해 준 것만도 고맙지 않은가. 그리고 창밖에 내던진 성냥개비를 주워다가 성냥갑 안에 잘 넣어 두었다. 반쯤 남은 몸으로나마 한스러움 없이 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다. 불 한번 못 켜 보고 사라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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