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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뿌리의 은유 / 정태헌

부흐고비 2020. 12. 4. 08:30

이슥한 밤, 생명이 에너지를 충전하여 키를 한 뼘씩 키우는 시각이다. 어둠은 밝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밤에 다시 펼쳐 놓고 그 사유의 뜰로 손목을 잡아 이끈다.

그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 먹이를 잡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발목을 강물에 서려두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흰색 몸통에 가슴과 옆구리에 난 회색 세로 줄무늬가 신비스러웠다. 물살은 왜가리의 발목을 하염없이 적시며 흘렀다. 강물 밖으로 삐죽 내민 바위나 주변 땅에 날개를 접으면 되련만 왜 강물 속에 발목을 담그고 있는 것일까. 강가에 서식하는 수초식물처럼 발은 강물 속에 두고 몸체는 밖으로 내민 형국이었다.

달포 전, 섬진강변을 지나다 눈에 잡힌 한 풍경이다. 왜가리는 몸통보다는 흐르는 강물 속에 담그고 있는 두 발이 더 궁금하기만 했다. 불현듯 두 발이 왜가리의 뿌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왜가리는 땅속에 내릴 수 있는 뿌리가 없어 두 발을 강물 속에라도 내린 것일까. 날개를 가진 왜가리의 삶의 터전은 하늘일까 땅일까 강물일까.

왜가리에 대한 생각을 품은 채 지리산 기슭으로 향했다. 피아골 계곡을 한참 오르다 보면 길이 끊어진 곳에 철판으로 이어 놓은 다리가 있다. 그 철다리 중간쯤, 오른편 계곡 쪽으로 몸을 눕힌 한 그루 나무가 눈에 띄었다. 뿌리 내린 땅속에도 양분과 수분이 있으련만 무슨 영문인지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10여 미터 떨어진 계곡 쪽으로 몸을 45도쯤 기울이고 있었다. 바소꼴의 잎에 나무껍질은 코르크증이 두껍게 발달하여 깊이 갈라진 우람하고 키 큰 굴참나무였다.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을 기웃거린 것일까. 언제부턴가 동물보다 식물에 더 마음이 쏠린다. 식물 가운데서도 나무에 더 눈길이 머문다. 나무는 지상에서 기품 있는 생물 중의 하나이다. 지표에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친 모습은 꿈을 꾸는 자의 형상이다. 나무는 다른 어떤 생명도 포식하지 않고 자급자족해 살아가는 생산자다.

어쩌다 사람의 손에 붙들려 거처를 옮길지라도 하늘을 향한 묵도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 비바람이 몰아쳐 뒤흔들릴지라도 애오라지 머리 위를 지향할 뿐이다. 넘어지거나 뽑히지 않고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깊은 뿌리 때문이다.

나무는 먹이를 구하고자 주변을 맴돌지 않는다. 한번 뿌리를 내리면 하늘이 준 햇볕과 땅이 준 물로 목숨을 일군다. 바람 속의 먼지 같은 것들은 다 뿌리치고 변치 않는 하늘과 땅에 기대어 생을 질박하게 꾸려 간다. 산짐승처럼 정처 없이 거친 숲을 싸다니며 터무니없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사람의 집에 안주하며 주인이 던져주는 밥이나 축내면서 아양 떠는 애완 강아지하고는 사뭇 다르다.

나무가 한곳에 붙박여 있어도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향하여 올곧은 삶을 일굴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그만한 믿음이 있다. 가뭄이 들어도 태풍이 몰아쳐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있기에 가능하다. 때문에 나무는 뿌리를 소중히 여겨 땅속 깊이 뿌리 내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무는 땅에 영양분이 많을 때 이곳저곳에 잔뿌리를 많이 뻗어 만들어 놓아다가 가물거나 땅이 척박해졌을 때 뿌리를 태워 영양분으로 삼는다. 그러기에 건목建木은 깊고 많은 뿌리를 지닌다.

얼마 전 들바람을 쐬고 싶어 한적한 근교로 나간 적이 있다. 길가에 여린 채송화 싹이 보이기에 몇 포기 뽑아다가 집에 있는 빈 화분에 옮겨 심고 살폈다. 처음엔 예닐곱 포기였는데 두 포기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시들머들하고 말았다. 들길에 그냥 둘 걸 하고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들어버린 채송화들은 달라진 환경에서 뿌리내리지 못했을 터이다. 대신 살아난 채송화에 마음들여 물을 주고 틈나는 대로 눈길을 주었더니 뿌리가 잘 내렸는지 등뼈를 세우고 손가락 두 마디쯤 크기로 머리를 들었다.

낮 동안 억압되었던 우주의 무의식이 만개하는 이 시각, 깊어가는 밤과 함께 생각도 깊어간다. 산기슭의 굴참나무, 강가의 왜가리, 베란다의 채송화가 갈마들어 눈에 암암하다. 뿌리는 각다분한 일상에서 사유하지 않고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녹색지대다. 이 밤, 존재를 키우고 버티게 해 주는 뿌리는 어느 현자의 전언이요 잠언의 한 구절 같다.

그들의 뿌리는 햇빛과 공기를 등진 채 땅속 물속, 어둠과 진탕 속에서 존재의 성장을 위해 그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뒤척였을까. 그 어둠과 고통이 있었기에 땅 위에서는 밝음과 환희, 생명과 열매가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산행 길에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은 뜻밖에도 뿌리였다. 손으로 빈약한 가슴을 쓸어본다. 가슴은 영혼의 집이며 인간의 뿌리이다. 시방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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