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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새에게는 길이 없다 / 김정화

부흐고비 2020. 12. 10. 08:35

새를 만나는 날은 글을 쓰는 것만큼 행복하다. 글을 쓰는 것만큼 새를 만나는 일도 행복하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침묵으로 새를 만난다. 새와 나란히 걸으며 해송 사이로 밀려 오는 갯바람과 사각대는 억새와 입선(立禪)에 든 겨울나무의 잔가지가 떠는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이러한 새의 몸짓이 내 상념을 흔들어 깨운다.

동살이 잡힐 무렵 공기의 부력으로 삼라만상을 회전시키는 새들을 볼 때면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꿈꾸기도 한다. 때로는 새의 비상 뒤에 남겨진 긴 여운에 기운이 빠지기도 하지만 비상 같은 글쓰기는 내가 새가 되는 시간이다. 가진 것 없으면서 가벼우나 단단한 날개로 하늘을 가르는 힘찬 몸짓에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성스러움이 담겨 있다. 글도 그러리라 믿는다.

어릴 적에 사방이 논밭으로 둘러싸인 시골 외딴집에 살았다. 집 앞 개울의 갈대밭과 늪에는 무수한 종류의 새들이 찾아왔다. 종다리와 들꿩과 물닭 무리까지 계절을 잊지 않고 조용히 깃을 내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에게도 가히 위협적인 장대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때마침 어미 새 한 마리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논둑 둥지 속 알을 지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떠한 외부 환경에도 꿈쩍하지 않으려는 부동의 자세는 모정을 뛰어넘어 차라리 초연함이었다. 그 박힌 상(像)은 어찌나 뚜렷하게 각인되었는지 지금도 간혹 빗속의 새를 만나면 발길을 쉽게 옮길 수 없다.

나의 글쓰기는 떠나온 고향을 처음 찾았을 때 시작되었다. 삼십여 년 전, 당시 한꺼번에 부모님을 잃게 된 어린 남매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고 눈이 시려 왔다. 그런데 우연히 철새들의 서식지인 우포늪에서 비상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다가 문득 내 고향에도 새들이 앉았던 자리가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 아련한 기억이 힘겨운 발걸음을 이끈 것이다.

그후 마음이 적적할 때면 고향 인근의 강과 저수지를 찾는다. 그곳에서 만나게 된 철새들이 나의 고적감을 차츰 치유해 주기 시작했다. 뻘흙 속에 발을 담그고 생명의 겨울 뿌리를 훑는 새들을 지켜보면서 고향은 뻘흙 같은 곳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수초가 겨울에도 싱싱한 뿌리를 내리는 그곳은 가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원초적인 장소라고 여겨졌다. 청둥오리 떼가 화려한 군무로 귀향하는 모습을 지켜본 날 처음으로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신성한 새의 몸짓은 허둥대던 마음을 일으켜 주었고 글 속의 마지막 방점은 여릿한 마음을 조금씩 아물게 해 주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고향을 잃은 게 아니라 스스로 찾지 않았던 것이다.

새를 만나면 지금도 마음이 설랜다. 여행지에서 낯익은 새를 만날 때면 잃어버린 고향을 찾은 것처럼 가슴이 떨려온다. 노랑부리저어새가 주둥이를 뻘물에 넣고 휘휘 젓는 모습에서 시골 어머니의 영락없는 주걱질을 떠올리기도 하며 노목(老木)에 앉은 곤줄박이를 볼 때면 아버지의 잿빛 중절모를 생각한다. 적도 부근의 섬에서 공중을 선회하던 사막새와 붉은 바위산 아래에서 깃털을 털고 있던 열대조의 몸짓도 잊을 수 없다. 글의 길을 가다 보면 이러한 새들과의 낯선 만남으로 묵었던 응어리가 슬며시 풀리기도 한다.

언젠가 단테의 생가를 찾아서 피렌체 거리를 배회한 적이 있다. 중세 예술가들의 조각이 살아 숨 쉬는 웅장한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은 첨탑 지붕의 화려한 성당과 푸른 대리석 벽의 주택 창가에 놓인 제라늄 화분들이 눈부셨다.

그 길에 또 다른 길이 포개졌다. 이십 년 만에 찾은 고향 강변길이다. 그리운 사람들이 떠난 후 척거된 집터와 진흙탕 사이로 겨울바람만 불어오면 황량한 강둑이 시간을 깎아내고 있었다. 단테의 생가로 이어지는 길은 짧았고, 개발에 묻힌 고향길은 누적된 시간만큼 길었다. 이제 그 길들이 제각각 내 가슴 속 두 심실에서 글의 길로 이어내고 있다.

단테의 생각에서 본 흰종이새를 떠올린다. 가까스로 찾아간 생가는 이끼 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눈에 뜨인 것은 석벽에 걸린 단테의 토로소가 아니라 누군가 갓 붙인 것 같은 풀기 머금은 한 장의 종이였다. 그 속에는 유리딱새 같은 오종종한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금방이라도 물기를 털며 뛰쳐나와 관목 사이로 숨어들 것만 같았다. 새의 크기와 색깔이며 연락처와 그 동안 주인이 불렀던 이름까지도 꼼꼼히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잃어버린 새를 찾는 내용으로 짐작되었다. 그 신선한 충격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없어진 것에 대한 미련은 남게 마련이다. 날아가 버린 새를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주인은 새를 찾기 위한 마음으로 종이를 붙이지는 않았을 게다. ‘심우도’ 속의 수행자가 인간 본성을 찾아가듯이 ‘신곡’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단테를 닮고자 행한 일이라 여겨진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잊지 못해 밤마다 어루만졌던 석벽에서 어떤 이는 날아가 버린 새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작은 나라에서 온 여행자는 한동안 영감(靈感)의 새를 찾아서 서성거렸다.

새들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귀가 열린다. 바다의 산책길에서 만나는 흰하늘새가 매일 아침마다 심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려 주지만 나는 그것을 잘 듣지 못한다. 늘 설익기만 한 내 글에는 아직도 고향의 울림과 새들의 소리가 절반도 담겨있지 않다. 하지만, 새를 통해서 글에 눈을 뜨고 또 다른 마음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면 미조(迷鳥)를 찾아나서는 힘겨운 길몰이를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새에게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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