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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부흐고비 2020. 12. 11. 09:00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

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

‘빗방울’을 들을 때마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 여덟의 쇼팽은 인후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연인인 조르쥬 상드와 함께 마요르카 섬으로 요양을 떠난다. 두 연인은 방을 얻지 못해 폐허가 된 발데모사 수도원에 머물며 투병생활을 한다. 상드가 약을 구하기 위해 팔마 읍내로 나가자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쇼팽은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피아노로 받아 적는다. ‘빗방울’ 속에는 병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 그리고 빗속에서 상드를 기다리는 사랑과 연민 등 온갖 감정이 녹아 있다. 곡 전체를 통해 빗방울처럼 들리는 음(A-flat)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2부로 넘어가면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굵고 격렬한 음들이 수도원 지붕을 두드린다. 장엄하고 처절하다.

흐려진 창문가에 서서 쇼팽의 ‘빗방울’을 듣는다. 희미한 기억이 비오는 날 고향집 추녀 밑에 서 있는 소년을 불러낸다. 자세히 보니 그 소년은 바로 나다. 상드를 기다리는 쇼팽처럼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고 권태롭다. 마당에 떨어진 빗물이 모여 작은 개울을 만들어 삽짝 밑으로 빠져 나간다. 닭들에게 던져준 달걀 껍데기가 소나무 껍질 조각배처럼 물결을 타고 넘실넘실 흘러간다.

나도 쇼팽처럼 외롭고 쓸쓸하다. 논에 물꼬를 보러 나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린다. 굵은 빗줄기는 마당 가득 물방울을 만들어 다른 흘러가는 모든 것들과 어울려 떠내려간다. 그러나 유독 나의 외로움은 흘러가지 않고 켜켜로 쌓이기만 한다.

콩 만 한 빗방울의 크기를 보고 콩을 구워 먹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든다. 머슴애가 부엌에 들락거리는 것을 어머니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차,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성경책이나 찬송가의 갈피를 뒤지면 연보하고 남은 몇 푼의 지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기특한 생각. 아니나 다를까 당첨복권은 성경책 속에 있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길 것이며”란 구절이 쓰여 있는 성경을 자주 읽으라고 말씀하셨나 보다.

들에 나간 어머니도 더 이상 기다려지지 않는다. 더 이상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전 한 푼 들고 두 집 건너 공(孔)씨 네 엿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비오는 날 말랑말랑한 갈색 조청만치 맛있는 주전부리꺼리는 이 세상에 다시없다.

동생이 “형아, 니만 묵지 말고 나도 좀 도”라고 말하기 전에 미리 한 조각 떼어내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세상이 어찌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조청을 사탕 크기로 만들어 입에 넣고 나니 학교에서 배운 온갖 동요가 흥얼거려진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실 때가 되면 책을 펴들고 열심히 공부하는 채 해야 한다. 연일 고된 농사 일로 속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나까지 애를 먹이면 벼락 천둥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내 귀에는 수도원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그럴 때마다 그냥 유리창처럼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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