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궤나 소리 / 구활

부흐고비 2020. 12. 11. 15:16

궤나는 악기지만 흔한 악기는 아니다. 궤나가 연주되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궤나라는 낱말은 우리말 큰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궤나가 악기라면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목관, 금관, 건반, 현이나 타악기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 천사들이 부는 나팔 같은 것일까.

옛날 잉카인들은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그 사람의 정강이뼈로 궤나라는 악기를 만들어 떠난 이가 그리울 때마다 그걸 꺼내 구성지게 불었다고 한다. 성악가들이 부르는 아리아는 아랫배에서 가슴을 거쳐 입으로 연주하는 육관(肉管)악기의 음악이라면 궤나 소리는 사람 뼈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새어 나오는 단음절로 연주되는 골관(骨管)악기의 음악이다.

궤나로 연주되는 소리를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 그리움이 끝없이 이어지면 비탄의 심연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 조각들이 한숨에 섞여 흐르는 듯한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와 같은 슬픔으로 끓인 범벅 같은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Pieta)에서 성모 마리아가 숨이 끊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흘리는 보이지 않는 눈물의 줄기 같은 것일까. 아니면 영화 ‘미션’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는 가브리엘의 ‘넬라 판타지아’(엔니오 모레꼬네의 곡)처럼 맑고 날카로운 음색이 가슴을 후벼 파는 그런 음악일까.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가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 그리워질 때면 그립다고 부는 궤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짐승들을 울게 하는 소리/ 오늘은 이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파/ 전생에 두고 온 누가/ 내 정강이뼈를 불고 있나 보다/ 그립다 그립다고 종일 불고 있나 보다’(김왕노의 시 ‘궤나’의 부분)

‘궤나’라는 시를 읽고 있으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오래 전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친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막내 동생이 조금 전에 숨졌다”는 안타까운 전갈이었다. 친구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급하게 나를 부른 것 같았다.

막내는 스물다섯으로 시 쓰기에 매달려 있던 문청이었다. 흔히 그렇듯 시인의 생활패턴은 개판에 가까워야 하고 술을 많이 마셔야 좋은 시가 써진다고 믿고 있던 그런 시대였다. 그 녀석도 불확실한 믿음에 순종하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았기에 결국 이른 죽음을 맞이한 요절문인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친구도 그렇거니와 석양주에 취해있던 나도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야밤중에 무슨 일을 했는지 다음날 퇴근 후에 상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오래된 기억은 기억이 아니다. 그건 농담에 가까운 환영이다.

중요한 것은 발인 당일이었다. 미혼 총각의 장례는 예나 지금이나 화장을 한 후 유골을 산천에 뿌리는 것이 관례다. 유리창 밖에서 유골가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녀석의 친구가 “굵은 뼈 조각은 분쇄하지 말고 자기를 주면 동인들끼리 하나씩 나눠 갖겠다.”고 했다. 궤나라는 악기를 만든 인디오들의 순진무구한 발상처럼 기특하게 느껴져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친구 형제와 나 세 사람이 금호강 아양교 밑 강물로 들어가 유골가루를 흘려보냈다.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둑으로 올라와 보니 녀석의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남은 뼈 조각을 전하려 해도 아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유족에게 맡기려 해도 슬픔에 불을 지르는 것 같아 한지에 쌓인 궤나 재료들을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박고석 화백의 부인 김순자 여사는 남편이 보관하라며 건네준 약봉지에 쌓인 이중섭 화백의 유골가루를 뭔가 싶어 맛을 봤다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약과지. 아내 몰래 민속품을 모아둔 캐비닛 구석에 감춰두었다. 백자로 구운 어느 문중 묘지에서 나온 지석(誌石) 두 편을 유골 위에 덮어 두었더니 감쪽같이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정(精)의 이탈로 혼(魂)과 백(魄)이 갈라지게 된다고 한다. 혼은 가볍고 밝은 성질이어서 영계로 쉽게 진입하지만 백은 무겁고 탁한 기운이 있어서 주검이 놓인 자리에 그대로 머문다고 한다. 하물며 몸을 지탱한 뼈였으니 녀석의 영혼도 우리 집에서 봄 한 철을 잘 지내다 하늘나라로 올라갔겠지.

결국 대청소를 하던 술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내 맘대로 내다 버릴 수는 없었다. 삼 개월쯤 지난 어느 날 동인들이 고인의 추모 시 테이프를 만들어 모임을 갖는다기에 그걸 들고 나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전해 주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한 때 녀석과 연애를 했던 여자 친구 조차 뼈 한 조각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 그리움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란 걸 모르는 철없는 풋사랑이 궤나 음악을 어찌 알랴.

녀석은 그렇게 갔지만 내가 떠날 땐 무리한 산행으로 자주 관절통에 시달리던 내 정강이뼈로 궤나를 만들어 부는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는 떨리는 손으로 괘나를 부여잡고 에콰도르 출신 인디오 뮤지션 레오 로자스가 펜풀룻으로 연주한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란 노래 한 곡을 들려주면 얼마나 좋으랴.

나의 궤나에선 팔공산 솔숲을 스쳐 지나가는 솔바람소리가 앞장서 달리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가 뒤따라가면서 멋진 화음을 이룰 텐데. 해질녘 저승 언덕에 앉아 내 뼈로 만든 궤나를 내가 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당의 미학 / 노혜숙  (0) 2020.12.14
호미 / 김영미  (0) 2020.12.14
빗방울 전주곡 / 구활  (0) 2020.12.11
새에게는 길이 없다 / 김정화  (0) 2020.12.10
꼬리를 꿈꾸다 / 최민자  (0) 2020.12.0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