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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까치집 / 허세욱

부흐고비 2020. 12. 15. 12:52

해거름 하산 길은 늘 아쉬웠다.

여인들이 풍덩한 치마폭을 추스리듯 물결치던 산줄기가 그 끝자락을 끌어당기는 곳에는 으레 난장판이 벌어졌다. 넓다란 바위가 폭파당한 뒤 그 까만 살덩이가 산산이 부서지고, 등뼈가 까무러뜨린 채 뻘건 늑골이 흉물스럽다. 거기다 어느새 삐죽삐죽 꽂힌 앙상한 철근 사이로 벌떡 누워버린 나무들이 뿌연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 여기 호젓한 산 모퉁이에 서면 숨은 듯 초가집 지붕 옆으로 몽기몽기 작은 굴뚝에서 연기를 만날 차례인데, 그리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도란도란 말소리에 딸그락 딸그락 숟갈 소리가 들릴 때인데 말이다. 이렇게 두리번 두리번 한참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남아 있는 서러운 노을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건너편 개울가 높다란 감나무에 살짝 까치집이 걸려 있었다. 옛날 아주 옛날, 내가 고향 마을 뒷동산에서 연을 날리다가 휘몰아오는 삭풍 그 영악스런 화살에 툭- 끊겨버린 가오리연, 그 모양을 닮아 있었다.

​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갖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키가 큰 나무 그 꺼벙한 말초에 더덩실 지어 있는 까치집이요, 또 하나는 봄날 배고픈 산골짜기를 서럽게 한풀이 하는 뻐꾸기 울음이다. 하나는 그림으로 서 있고, 하나는 소리로 일렁이었다. 하나는 반공에 걸려 있고, 하나는 숲속에 숨어 있다. 그 중에도 까치집만은 언젠가 거짓말처럼 내 집 뜨락에 휘영청 들어설 것 같은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 언젠가 노 시인이 관악산 산기슭에다 새 집을 짓곤 나더러 놀러오라고 했었다. 그 휑하게 널따란 마당 한 귀퉁이에 소나무 마른 가지들을 짚 둥우리 모양으로 엮어서 작은 소망을 짓곤 그 특유의 웃음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자주 소매나 뒤를 보는데 그럴 때마다 거기에 쭈그려 앉아 솔솔 불어오는 바람결에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저 별들과 친교하는 일이 쏠쏠하다고 덧붙였다. 노 시인이 마른 나뭇가지에 알몸을 맡겼던 그 마음을 알 만도 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었다.

​ 낙목한천 먼 먼 산자락을 배경삼아 기운차게 뻗친 마른 가지 사이로 푸석푸석 엉성한 둥지는 차라리 한 폭의 문인화다. 바람이 솔솔 지나가고 별들이 지척에서 소곤거리고, 일년 내내 보송보송, 절대 눅눅하거나 질펀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혼자서 산자락에 고립하여 아프도록 외롭지만 날마다 듣느니 바람이요, 보느니 별빛과 창공이라.

​ 달밤이면 어쩌랴! 달빛 푸르른 둥지에서 차가운 등짝을 어미의 품속에 묻고, 오직 어미의 체온으로 밀물 같은 산바람을 둘러쓰면서 밤새도록 그 가냘픈 신음 소릴 뿌리는 것도 까치집이란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 언제부턴가 내게는 까치집이 다만 한 폭의 그림으로만 뵈지 않았다. 그 속에 생활이 있고 사랑이 있는 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둥지는 살아 있는 나뭇가지 사이에다 죽은 가지를 물어 가로 세로로 건너지른 것이다. 어쩌면 인류가 최초로 시도했던 결구(結構)식 건축의 원형인 것이다. 이승과 저승이 맞닿은 곳에 자리하면서도 위기를 범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 위기 속에서도 새끼를 낳아 그 주둥이에 먹이를 넣어주고 암컷을 꼬셔와선 보듬고 핥고 온갖 짓을 감추지 않았다.

​ 가장 높은 곳에서 아무런 간섭 없는 가상자리가 부러웠다. 한 골목 한 지붕에 살면서 아옹다옹 부딪치며 부라리며 또 멱살잡을 일이 없는 것이다. 나뭇가지 몇 쪽에다 마른 풀이나 지푸라기 한 줌이면 따로 세간 장만할 일이 없다. 사람들처럼 상량 올리고 거기다 먹글씨 쓰고, 돼지 머리에 꾸벅꾸벅 절할 일도 없거니와 붉은 벽돌, 푸른 벽돌 채곡채곡 쌓아 놓고 그 위에 몇천 볼트 전류를 흘려 높은 담 칠 필요가 더구나 없는 것이다.

​ 까치는 저 내세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휘휘 인간들의 안마당과 출렁출렁 파도치는 산자락을 굽어보면서 그 작은 잠자리를 탓하지 않는다. 정녕 이 땅, 이 하늘에 변괴가 생길지라도 이 바람머리를 피하지 않을 것이다.

​ 이른바 삶이나 목숨이란 것이 기껏 나뭇가지에 잠시 붙어 산다는 것을 짐짓 알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인간들이 기숙(寄宿)이나 기생(寄生)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모른다.

​ 그러나 때로는 추억처럼 아련한 곳에 떠 있다. 바짝 다가서서 우러러보면 둥지 사이로 하늘만 보인다. 볼 때마다 둥지는 비어 있다. 까치는 죄 어디로 갔을까? 까치가 비인 자리에는 하늘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까치집의 주인은 하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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