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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매천(梅泉)의 뜰에서 / 이정림

부흐고비 2020. 12. 16. 09:06

문우 몇이서 지리산의 노고단을 가기로 한 날로부터,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의 일정은 노고단에서 해돋이를 본 다음, 화엄사를 들러 뱀사골이나 피아골을 오르는 것이지만, 나만은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네 시에 구례역에 내리자 안개가 마치 마중을 나와 있었던 것처럼 와락 내게로 달려들었다. 안개와 농촌의 들녘에서 풍겨오는 퇴비냄새를 가르며 노고단에 오르니 아침 여섯 시, 우리는 산 너머 또 산이 주름처럼 겹쳐 보이는 정상에서 역사의 한(恨)이 골마다 서려 있는 지리산을 유정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출의 장관은 놓치고 말았다.

일행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서둘러 하산을 했다. 다음 일정은 화엄사를 들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먼저 매천사(梅泉祠)로 가자고 제의를 했다. 내 느닷없는 제안에 일행은 어리둥절했고, 택시 기사는 거기에 가자는 손님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백미러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매천사는 구한말의 시인인 매천 황현(黃鉉:1855~1910)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우(祠宇)이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매천은 나라 잃은 슬픔에 식음을 전폐한다. 그러다가 8월 29일 그 사실이 <황성신문>에 발표되자, 그날 반 네 편의 <절명시>를 지은 후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 인간 세상에 그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 나는 우연한 기회에 <절명시>를 대하고 나서부터, 언젠가는 꼭 그 분의 고택이나 사당엘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개결(介潔)한 선비의 청혼(請魂) 앞에 향불이라도 피워 올리고 싶었다.

사당은 주위에 이름난 가람들이 많아서인지, 그 규모가 나무도 작고 초라해 보였다. 또 찾는 발길이 없는 듯, 쓸쓸하리만큼 조용하였다. 그러한 모습에서 나는 이 세대가 고절(高絶)한 선비의 정신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 시대에도 선비 정신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일까.

사당 댓돌에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묵념을 올린 후, 잠시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있자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하는 <절명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글을 나는 사람, 그것은 선비요 지성인을 일컬을 것이다. 지훈은 매천의 <절명시> 중에서도 이 세 번째 시를 유독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도 참선비의 정신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뇌했더란 말인가.

나라의 녹(錄)이라곤 받아 본 적이 없는 포의한사(布衣寒士)로서, 매천은 자기가 자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유서 속에 밝혔다.

“나는(벼슬을 안 했기에)죽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조국이 선비를 키운 지 오백 년이나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는 국난(國難)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쉰여섯이라는 나이에, 매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대의 명분은 바로 책 속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는 연유를 그는 아들에게 밝혀 놓았다.

그렇게 의사(義死)한 매천이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 행동이 결여된 지성을 부끄러워하였다.

​ 내 일찍이 나를 버티는 일에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겨우 인(仁)을 이루었을 뿐 충(忠)을 이루지 못했어라./ 겨우 윤곡(尹穀)을 다른 데서 그칠 뿐/ 진동(陳東)을 못 넘어선 게 부끄럽기만 하여라.

​ 그러나 매천은 청직(淸直)한 선비로서 또 날카로운 지성인으로서 자기의 임무를 충분히 한 분이다. 임금께는 <언사소(言事疎)>를 올려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대응책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개화관(開化觀)을 밝혔는가 하면, <매천야록(梅泉野錄)>을 통해서는 당시의 시대상에 날카로운 비판과 투철한 역사 의식을 투영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비록 의병을 일으켜 일분에 대항하는 그런 적극적인 행동은 펴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한유롭게 시문이나 지은 소인묵객(騷人墨客)만은 아니었다. 면암(勉庵) 최익현의 죽음을 통곡하고 계정(桂庭) 민영환의 자결을 슬퍼하는 만시(輓詩)를 통하여 그도 붓으로 아픔을 함께했고 붓으로 항일을 한 우국 시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절(殉節)이라는 것이 아득한 옛날 속의 일처럼 여겨지지만, 헤아려 보면 매천이 그렇게 간 것은 불과 한 세기도 채 되지 않는 근세의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땅의 시인과 지성인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었던가. 역사의 전환기마다 곡학아세(曲學阿世)로써 불의와 야합하는 지성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여 핍박당한 시인들도 있었다. 또 일제 때는 친일시를 쓰더니, 군사 정권 때엔 그 독재자에게 구구절절이 아름다운 송시(頌詩)를 바쳤던 어느 시인은 지금도 여전히 존경받으며 국화꽃 옆에서 고고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사당 툇마루에 앉아 울 너머를 보니, 곧게 뻗어 올라간 취죽(翠竹)이 무성하다. 매천은 민영환의 사당 옆에 돋아난 대나무를 보며 <혈죽(血竹)>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나는 그 청죽을 보고도 시 한 편을 짓지 못하니 글재주 없음이 못내 부끄럽다.

​ “의(義)에 나가 나라 위해 죽으니/ 만고에 그 절개 꽃피어 새로우리./ 다 하지 못한 한을 남기지 말라./ 그 충절 위로하는 사람 많으리라.”

​ 만해(萬海)는 이렇게 가신 이의 삶과 죽음을 기렸건만 매천의 뜰에는 인적 없는 정적만이 바람처럼 떠돌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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