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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나의 무기는 / 곽흥렬

부흐고비 2020. 12. 15. 08:41

“군주는 권력 휘두르는 것으로 무기를 삼고, 여자는 성질부리는 것으로 무기를 삼는다.”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어느 큰스님의 법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한편으로는 다소 무리한 표현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경구警句인 것 같아 고개가 주억거려지기도 한다. 군주가 인자하지 않아서 백성을 힘으로 다스리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듯, 여자가 지혜롭지 못하여 가족에게 성질을 부려대면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아니하던가. 심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는 새들도 불안에 떠는 것처럼, 가정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주부가 분별없이 성을 잘 내는 집은 가족이 가슴을 졸이게 되는 건 정한 이치일지다.

우리말의 ‘성내다’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으면 ‘Anger’와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anger 앞에다 불량품 혹은 하등품이라는 의미를 지닌 알파벳 D를 갖다 붙이면 ‘Danger’로 바뀐다. 여기서 Danger는 우리말에서의 ‘위험하다’는 낱말과 통하니, 결국 성을 내는 일은 그만큼 나쁘고 저질스러우며 또한 위험하다는 뜻일 게다.

불가에서는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수행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들고서, 그중 보시바라밀을 첫 번째 자리에다 앉혀 놓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 보시바라밀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덕목으로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꼽는다. 무재칠시란, 이를테면 화안시和顔施, 언시言施, 신시身施, 심시心施, 안시眼施, 좌시座施 그리고 방사시房舍施 등 재물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를 일컫는 말이다. 문수보살 게송 가운데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供養具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성 안 내는 얼굴’이란 곧 화안시를 두고 하는 하나의 보시행 아니겠는가. 일곱 가지 무재시 중에서 왜 하필이면 화안시를 맨 앞에다 두었는지 그 까닭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구 없이 가슴속에다 제 나름의 무기를 품고 산다. 이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복이 되기도 하고, 거꾸로 화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가진 것이 많고 권력이 세고 지위가 높은 이들이 끼칠 수 있는 무기의 위력은 한층 크고 무겁다. 그러기에 그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일수록 행동거지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함은 너무나 자명한 조리이리라. 우리가 항용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까닭도 여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지만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법구경은 비유를 들어 가르친다. 지혜로운 자가 배우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어리석은 자가 배우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다. 본바탕은 같은 것이었을지라도 그 쓰임에 의해서 결과는 극과 극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이치일 터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다본다. 그렇다면 나의 무기는 무엇이었나? 나는 육체적으로 타인을 쓰러뜨릴 만한 힘도, 물질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만큼의 돈도, 사회적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킬 정도의 권세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타고난 것이라고는 글줄이랍시고 긁적거리는 알량한 재주밖에 지니지 못했으니,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이 어쭙잖은 능력으로써 나름의 무기를 삼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내 글이 풍진 세상살이에 고단하고 지친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가슴에 깊고 푸른 상처나 남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지난 시간들을 되새겨 보노라니 어쩐지 목젖이 따끔거려 온다.

지금껏 조자룡 헌 칼 쓰듯 아무 생각 없이 휘둘러 왔다면, 이제부터는 글 한 편, 문장 한 줄, 아니 하다못해 낱말 하나를 부려쓰더라도 비록 보잘것없으나마 이 사회에 겨자씨만 한 보탬이라도 되도록 늘 깨어 있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비록 존경 받는 작가라는 소리는 못 들을지언정 어디 욕 얻어먹는 작가라는 딱지가 붙는대서야 쓰겠는가.

*육바라밀: 바라밀이란 피안彼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을 총칭하는 말로, 여기서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의 여섯 가지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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