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화령별곡花嶺別曲 / 홍억선

부흐고비 2020. 12. 28. 09:17

내가 산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띠풀로 지붕을 이고, 흙벽으로 방을 꾸며 작은 한 몸 누웠으니 심신이야 그지없이 편안하다. 낮이면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때를 맞추어 찾아오고, 밤이면 달과 별이 늦도록 벗이 되어 세상일은 까마득하고, 세월이 얼마만큼 흘러간 줄 셈을 할 수 없다.

봄 아지랑이가 산등성이를 덮는가 싶더니 어느새 찬 서리 내려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고, 입동을 재촉하는 눈비에 날아가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짧은 해 쉬 지고 긴긴 밤 웅크리고 누워 적막강산 외로운 처지를 돌아보면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내 인생의 역정이구나. 막상 입을 열자 하면 자랑할 일이 전혀 없고, 그렇다고 말자 하면 영영 묻혀질까 염려되어 무딘 글로 두어 자 적어 본다.

선대께서 당쟁에 밀려 궁벽한 소백산 자락 화령에 터를 잡고 대를 잇게 하였으니 퇴락한 가문, 궁핍한 가세에 내 몸이 본디 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철들면서 이 집 저 집 남의 문간을 기웃거려 푼돈이나마 모은 덕에 삼오이팔 겨우 넘겨 장삿길로 들어섰다. 유천, 예천, 개포, 용궁, 5일장을 돌면서 철 따라 모전을 보기도 하고, 낙과도 내다 팔아, 어두운 게 장사 이문이라 하루하루 다닐수록 발걸음이 가볍고 재미가 쏠쏠하였다. 일 년하고 열두 달을 빠짐없이 돌다 보니 인연도 따라붙어 아장아장 꽃재를 넘어온 경주 손씨녀를 만나 드디어 일가를 이루었다.

겸연쩍지만 손씨녀는 숙맥처럼 무던하여 나로서는 참으로 과분하였다. 일심으로 수레를 끌고 밀며, 천막을 치고, 장을 펴고, 식은 죽밥 함께 먹고, 이 장판 저 장판을 돌면서도 남다른 정분 끝에 자식 여섯을 두었다. 세상살이가 어찌 생과 낙만 있을까마는 고통은 삶의 보람에 묻히고 왜정, 광복, 동란을 겪으면서도, 자식은 무병무탈로 무럭무럭 장성해 어느덧 정든 슬하를 떠나 하나 둘씩 떠나갔다. 세월이 유수 같아 장돌뱅이 이력으로 회갑년을 넘기자 근동에서 제일가는 갑부 소릴 듣게 되고, 자식 또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무한히 번성하였으니 참으로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아마도 그 일이 계축년이었던 모양이다. 일련의 무리들이 마을로 쳐들어오는 황당한 일을 당하였다. 산을 뒤집고 옥답을 깔아뭉개 비행장을 만든단다. 천부당한 말씀이요, 만부당한 일이었다. 동란의 포탄 속에 주추를 깔고 기둥을 세운 집을 어찌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쇠똥 개똥 주워 만든 피 같은 문전옥답을 어찌 야무진 자갈돌로 덮을 수 있단 말인가. 일족들은 짐을 꾸려 뿔뿔이 떠나는데 나로서는 참으로 불가한 일이었다. 울며불며 빌어 보고 멱살을 잡아 봐도 거대한 힘을 무너뜨리지 못하였으니 철망 옆에 움막을 짓고 허물어지는 내 집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밥을 먹다가도 멀뚱멀뚱,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비몽사몽 헤매며, 허둥지둥 다니다가 불각 중에 그예 윤화를 당하였으니 내 일생이 이렇게 마감을 하였구나. 덩실덩실 춤추며 꽃가마 타고 올 길 거적때기 가로누워 눈물 아롱 왔으니 서럽고도 한스럽다. 일가친척 처자식과 수인사도 없었으니 두고 온 말들은 태산처럼 남았구나.

으스스한 가을날에 소식이나 알자고 한 손은 등걸 잡고, 한 손은 이마 짚어 먼 길을 바라보니 묶인 몸 묶인 두 발로 어찌 온 길을 되짚어 갈 수 있을까. 알뜰살뜰 내 맘을 헤아려 소식 전하는 이도 없으니 무심중에 원망하는 건 손씨녀뿐이로구나. 원망 끝에 걱정이라 홀로 남은 몸이 괄시는 받지나 않을는지. 가뜩이나 굼뜬 놀림에 조석 죽밥은 넉넉하게 드는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두런두런 기척이 들려 두 귀를 쫑긋하니 아니 이게 누구던가. 일 년에 두어 번씩 추석 묘사 때를 맞춰 자손들이 앞앞이 손을 잡고 나를 찾아오는구나. 객지 각처 흩어져서 씨를 뿌리고 살던 후손이 일시에 모여들어 겅충겅충 우거진 쑥부쟁이를 자른다, 아카시아 넝쿨을 뽑는다, 한참 동안 모양을 내더니 한잔 술을 부어 놓고 일시에 엎어진다. 오랜만에 화기가 만당하여 원망의 심정이 봄눈 녹듯 하였으나 웃음도 잠시일 뿐 주춤주춤 뒤를 보며 모두들 떠나간다. 나무들 사이로 옷자락이 멀어지고 말소리조차 끊어져 이제 아주 적막하니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마저 도는구나.

무서리가 짙게 내린 동짓달 어느 새벽, 언덕 밑이 소란하여 설잠을 깨었더니 뜻밖에도 애틋한 곡소리가 심정을 섧게 한다. 퍼뜩 지나가는 생각에 미수 지난 손씨녀가 그예 세상 이별하고 내 곁으로 오는구나 하였더니 어찌하면 좋으랴. 올 사람은 아니 오고 전도가 창창하여 구만리 길 막내놈이 무슨 일 그리 급해 앞장서 오는구나. 억장이 무너지고 애달픈 마음은 천지보다 깊고 넓다. 깊은 밤 부자가 손을 잡고 네가 어쩐 일이냐 끝없이 물어 본들 썩은 가슴 부여안고 피를 물고 누운 자식 어쩔 도리가 있을까. 이 세상에 먼저 와서 어린 자식 맞으니 가련한 맘 가없어도 세월이 약이던가. 하룻밤은 저가 와서 내 등을 토닥이고 하룻밤은 내가 가서 저 가슴을 쓸어 주니 길고 긴 동짓밤도 그럭저럭 지나간다.

엄동설한 지나가고 정원 이월 당하여 죽은 풀이 소생하고 마른 나무에 움이 돋자 화령 꽃재에 개화만발 우거진다. 춘흥이 절로 일어 사립문을 열어 놓고 흘러가는 개울물에 소식을 전해 본다. 긴긴 인생 함께 살다 늘그막에 홀로된 손씨녀는 무슨 미련 그리 많고 어떤 영화를 누리기에 한자리에 눌러앉아 떠나올 줄 모르는가. 세상사람 말과 달리 이곳에도 봄이 오면 양지녘에 햇볕 들고, 온갖 잡새 노래 불러, 터를 잡고 누웠으면 살 만한 세상이라. 부디 잰걸음으로 달려와 다시 한번 손을 잡고 남은 인연 이어 보자 축원하고 축수한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탈진실의 시대 / 이태곤  (0) 2020.12.28
공납금의 추억 / 양일섶  (0) 2020.12.28
버드나무 / 정성화  (0) 2020.12.24
오동나무, 울다 / 배문경  (0) 2020.12.24
숫돌을 읽다 / 허정진  (0) 2020.12.2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