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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한 형들과 누나는 생업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순서에 밀려 마지막에 태어난 나는 '불쌍한 막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형들은 내가 상고로 진학해서, 은행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친한 친구들이 인문계로 진학한다는 이유로 벽창호처럼 고집을 피워 인문계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집보다는 '경호'나 '민식' 같은 친구 집에서 먹고 자는 일이 더 많았다. 친구 어머니들은 항상 따뜻한 밥, 김, 계란과 갈치구이 같은 맛있는 반찬으로 상을 차려 주었고, 도시락에 용돈까지 얹어 주었기 때문에 굳이 집에서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빠듯한 살림에 입을 하나 덜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도 그렇게 개의치 않았다.
단지 내가 할 일은 친구들보다 공부와 운동을 조금 더 잘해야 된다는 것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시험기간에 친구들로부터 서로 자기 집으로 가자는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친구 집을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었고, 그 권한은 평소에 맛있는 걸 더 많이 챙겨 주는 친구의 집을 선택하는 것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경호네 집을 제일 많이 갔었다. 그 이유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호 집 바로 앞, 경호의 이모 집에는 우리보다 한 살 적으면서 아주 예쁘고 착한 여상 1학년, '미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선을 좋아했고, 미선이도 나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때부터 우리 친구 5명과 미선의 친구 5명이 자주 만나면서 각자의 파트너가 자연스럽게 정해졌고, 탁구장이나 빵집, 분식집을 다니면서 아기자기한 사랑을 나누었다. 경호의 애인, '정숙'의 어머니는 모든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었고, 항상 건전하고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10월 어느 날, 경호와 정숙은 다음 일요일에 10명이 함께 함안에 있는 '산인못'으로 놀러가자는 제안을 했다. 행사 진행 책임자로 나를 지명했다. 나는 그날부터 모든 공부를 접고, 원만하고 재미있는 행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신경을 다 써야만 했다. 남자들은 카메라, 녹음기와 기타를, 여자들에게는 김밥, 과일과 음료수를 책임지라는 임무를 부여했지만,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70년대 초부터 나오기 시작한 휴대용 야외전축(야전)이었다. 그것이 있어야 신나는 노래를 틀면서 여학생들과 같이 노래도 부르고 멋진 춤을 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사 책임을 맡은 나는 어떻게든 야전을 들고 가야겠다고 작심을 했다.
마침 어머니가 공납금을 납부하라며 2만 5천 원 정도의 돈을 주었다. 하루를 망설이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당시 만 오천 원의 가격으로 붉은색 뚜껑이 달린 새 야전을 구입해서, 친구 경호 집에 맡겨 두었다. 정해진 일요일이 왔다. 기차 안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산인못에 도착했다. 여학생들이 싸온 김밥과 과일들을 맛있게 먹었고, 소주도 간단하게 한 잔씩 걸쳤다. 경호와 민식이 들고 온 빽판을 공납금으로 구입한 야전 위에 올려놓고, 고고춤과 개다리춤을 추면서 신나게 놀았다.
당시 우리는 이종영의 '너' 송창식의 '왜 불러, 고래 사냥' 신중현의 '미인' 최헌의 '오동잎'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와 팝송으로는 'One Way Ticket' 'Keep on running' 'Delilah', 등을 많이 부르고 따라했다.
'철민'은 카메라에 예쁜 여학생들의 모습과 멋지게 춤추는 남자들의 모습을 계속 찍었다. 그날 저녁 철민은 우리의 모습이 담긴 필름 2통을 사진관에 맡겼고, 사진을 찾는데 드는 비용이 5천원 넘게 계산되었다. 나는 행사 책임자로서 마무리까지 잘 매듭을 지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남아있는 공납금을 아낌없이 팍팍 썼다. 친구들과 여학생들에게 사진을 공짜로 나누어주면서 고맙다는 칭찬과 인간성이 참 좋은 놈이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다. 행사 책임자로서 나 자신이 참 자랑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행사를 마치고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다니고 있던 중, 수업시간에 학교 급사가 우리 교실에 와서 나를 찾았다. 담임선생에게 불려가 공납금 독촉을 받았다. 8시간 정도의 쾌락이 그렇게 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어떻게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나흘을 불려 다니면서 가출을 할까, 죽어버릴까 하는 못난 생각도 많이 했지만, 결국 해결책은 우리 어머니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시는 어머니를 붙잡았다. "죄송해요... 저번에 준 공납금을 잃어버려서." 거짓말을 한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 '하아...'하는 어머니의 짧은 탄식이 들려왔다. 나는 지옥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욕이라도 실컷 듣고 머리라도 몇 대 두들겨 맞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이유도 묻지 않았다. 체념과 함께 실망하신 어머니의 표정을 보았다. 지난 일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알았다. 모레까지 해 줄게."라고 말씀 하신 후 바쁘게 가게로 나가셨다. 그제야 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아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가슴속의 눈물을 흘리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끔, 하늘의 하얀 구름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석 달 치 공납금은 예나 지금이나 제법 큰돈이다. 우리 애들 둘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납금을 면제 받았다. 나는 공납금 납부에 대한 부모의 부담감을 전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니었다. 힘들게 장사를 하시면서 10원짜리 하나 모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공납금 분실'이라는 철없던 아들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도 못난 막내아들의 말을 믿고, 기꺼이 공납금을 다시 마련해 준 어머니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자식에 대한 각별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는 사립고등하교 교사가 되었고, 어머니는 막내가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고 매우 좋아하면서 자랑을 많이 하고 다니셨다. 여든의 나이에 돌아가실 때까지 공납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초보 교사시절, 학교 관리자들은 직원모임 시간에 각 학년, 반별 공납금 납부 현황을 나타내는 붉은색 막대그래프의 상황판을 매일 교무실에 게시하였다. 교사의 자질이나 인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공납금을 제일 빨리 완납하는 담임이 우수한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반은 공납금 꼴찌해도 좋다. 공부 열심히 하고, 인간성만 좋으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학창시절의 작은 실수로 큰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차마 학생들을 교무실로 부를 수가 없었다. 다만 종례 시간에 '애들아, 우리 반 공납금 납부가 조금 늦다.'라고만 전달했다.
당시에 만났던 여자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전후로 모두 헤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멋진 친구 5명은 교사 2명, 사업가, 약사, 항공회사 간부로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10년 넘게 모임을 하고 있으며 나는 그 모임의 회장을 5년째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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