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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탱자나무 / 강천

부흐고비 2021. 1. 21. 14:13

누구네 집 울타리인지 정갈하게도 다듬어 놓았다. 둘레길을 걷다가 잠시 낯선 집 탱자나무 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울타리도 절반은 탱자나무였다. 나무 윗부분은 빽빽하게 잘 관리되어 담장으로서 훌륭했지만, 아래쪽은 구멍이 숭숭한 허점투성이였다. 멀리 정문까지 돌아가기 싫은 아이들의 쪽문이었고, 지각을 목전에 둔 학생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었다. 사랑이 묻어나는 점심 도시락이 슬며시 남모르게 넘나들었고, 길 가던 어른들이 곁눈질로 제 아이를 훔쳐보던 감시망이기도 했다. 더하여 아이들이 뛰노는 까르르한 소리가 넘어 나오고, 아지랑이 따라 봄기운이 스며드는 길목이기도 했다. 안과 밖, 학교와 외부를 가르는 담이지만 사실은 경계를 알리는 형식이었을 뿐이었다.

탱자나무가 꼭 무엇을 가로막는 금단의 의미였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커다란 탱자나무가 있었다.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와 더불어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줄기도 제법 굵어서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 타기도 하고, 노랗게 익은 탱자를 따러 올라갔다가 옴짝달싹 못 하게 갇혀버리기도 했다. 연이 걸려서, 용기를 뽐내느라 얼마나 오르내렸는지 나무줄기에는 반지르르 윤기가 흘렀다. 하얗게 무서리가 내린 것처럼 탱자 꽃이 한창인 날이었다. 마을길을 넓히는 새마을 운동으로 탱자나무는 기어코 커다란 덩치를 땅에 눕히고 말았다. 이제는 마을도 변했고 동무들은 떠나 버렸다. 탱자꽃 향기는 추억이 되어 아련히 맴도는데, 나무와 사람은 이미 전설처럼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탱자나무는 여러 가지의 이유로 사람 곁에서 살아왔다. 내 것과 남의 것, 넘지 말아야 할 경계의 의미로 줄지어 심어 놓는 울타리 역할이 대표적이다. 귀양 온 죄인의 거동을 제한할 목적으로 심을 때는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무속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저승사자나 악귀의 출입을 막는 액막이로서의 사명을 짊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살벌하고도 커다란 가시다. 누구의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걸맞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안다. 무시무시한 가시도 윗가지에만 있다는 사실을. 설사 가시에 걸렸더라도 섣부르게 서둘지 않으면 얼마든지 긁히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탱자나무 가시는 순 엄포용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자라면서 굵어진 밑둥치에는 아예 가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듬성듬성 틈바구니마저 생긴다. 바람조차 걸러낼 듯 서슬 푸르다가도 어느 날부터는 슬며시 틈을 만들어 놓는다. 가로막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이리라.

늦게 나다니는 딸아이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했다. 아비의 걱정이 제 딴에는 잔소리로 들렸는지 풀이 죽은 모습이 안쓰럽다. ‘빨리 들어오너라.’ ‘옷차림이 왜 그런 것이냐.’ 고정된 관념의 구석으로만 몰아가려는 아버지의 고리타분함이 딸과의 사이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아이들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보고 싶을 나이다. 그런 심정을 마음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품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만 한다. 마음 따로 말 따로, 나의 부적절한 대응으로 인해 부녀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간다.

내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나. 촘촘한 울타리를 만들었지만, 아래를 살짝 비워놓는 탱자나무의 혜안이 부럽다. 알 듯 모를 듯 조금은 틈을 벌려 놓는 것도 내 삶을 매끄럽게 만드는 지혜이지 않을까 한다.

한 생각만 넘으면, 이 무시무시한 나무도 호랑나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주식물이고, 아픈 사람에게는 훌륭한 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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