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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담바구타령 / 김진악

부흐고비 2021. 1. 22. 08:41

밥 먹듯이 담배를 먹는다고 한다. 모닥불을 피우듯 담배를 피운다고도 한다. 연기를 들이켜니 담배를 먹는다고 하겠으나, 죄다 넘기지 않고 입과 코 밖으로 연기를 품어내니 피운다는 말도 옳다.

먹으나 피우나 매한가지지만, 예부터 우리네 사람들은 대개 담배를 먹는다고들 하였다. 담배 연기는 마시는 연주(煙酒)요 연차(煙茶)이던 것이다. 매운 연기를 먹는 판에 못 먹는 것이 없고 안 먹는 것이 없다. 허구한 날 굶주리고 곯아서인지 먹는 데 이골이 났다.

욕을 먹고 나이도 먹는다. 눈칫밥도 밥이다. 빨래 풀 먹이고 연장에 기름도 먹인다. 어떤 권투 선수는 챔피언을 먹었다고 외쳤다. 옛말에 저 혼자 사또, 현감 다 해먹는다고 나무랐다. 국회의원을 해먹는다는 말은 만 번 옳다. 소금장수 얘기의 첫머리는 으레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을 적’으로부터 말문을 연다.

그제나 이제나 우리네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육장 먹어대고 피워대다 보니, 어느덧 애연 일등 국민이 되었다. 개화기에 이 땅에 몰려온 선교사들이 매우 질겁했다. 남녀노소, 상하귀천 할 것 없이 노상 담뱃대를 입에 달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담배 먹으면 천당 못 간다고, 목사가 신자들을 을러댔으랴. 먹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니러 나온 끽연자를 하나도 볼 수 없으니, 아무리 말려도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연초 애호의 나라에 응당 세계에서 으뜸가는 골초가 없을 수 없다. 씌어 있기를, 담배를 억세게 먹은 철록(鐵祿)이 어미하고, 연기를 겁나게 피운 용귀돌(龍貴乭)이가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고 하였다. 미처 왕조의 신록은 들쳐보지 않았으나 ‘철록이 어미냐 용귀돌이냐 담배는 잘도 먹는다’는 말씀이 우리 속담집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귀돌이의 뇌에 담뱃진이 벌통의 꿀처럼 절어서, 머릿속에서 검은 진을 파내는 데 여러 날이 걸렸다고 한다. 오대양 육대륙의 애연가들이 이 여인네와 남정네의 추모비라도 세울 법하다.

담배하면 철록이 어미와 용귀돌이만 받들 게 아니고, 담배를 가장 멋들어지게 먹은 조상도 알아두어야 하겠다. 그게 누군고 할작시면 『춘향전』에 나와 있는 시골 농사꾼이다. 마패를 감추고 남원골 어귀에 당도하여, 수작부리던 어사또를 혼내 준 농부. 이 농투성이 담배 빠는 모양새 한번 천하일품이었던 것이다.

‘한 농부 썩 나서며, 담배 먹세 담배 먹세. 갈멍덕 숙여 쓰고 둔덕에 나오더니, 담뱃대 넌짓 들어 꽁무니 더듬더니, 가죽 쌈지 빼어놓고, 몸시 침을 뱉아 엄지손가락이 자빠라지게 비싯비싯 단단히 넣어, 짚불을 뒤져놓고 화로에 폭 질러 담배를 먹는데, 농군이라 하는 것이 담뱃대가 빡빡하면 쥐새끼 소리가 나것다. 양 볼때기가 오목오목, 콧구멍이 발심발심하더라.’

손가락이 휘도록 연초 쟁이는 행동거지하며, 댓통 속에서 끓는 담뱃진이 내는 쥐새끼 울음소리하며, 볼따구니가 파이게 빨아대는 입술하며,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풀무질이 가히 가관이다. 내노라 하는 시인 묵객이라 해도 담배 빠는 몰골을 요로코롬 그려낼 수 없다. 고지식한 비흡연자들은 『춘향전』의 이 대목을 놓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밥 먹는 일이나 술 마시는 일이 모두 다 식후에 담배 한 대 꼬나무는 재미로 사는 애연가가 수두룩하다. 담배 없이 한 날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골초라면서, 정작 담배의 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 잎의 은혜를 입고 그 근본을 모르다니, 말이 안 된다. 그 씨앗은 먼지보다 조금 크고 참외 씨보다 훨씬 작다. 얼마나 작은가, 시골 아낙네가 부르던 담바구타령의 익살이 놀랍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담배씨만치만 보구 가소
많이 보면 병납니다.’ ─ 전북 여산 지방 민요

복숭아 연적 같은 가슴을 담배씨만큼 보라고 한다. 겨자씨만치 보았다간 탈이 난다. 담배를 상사초라 하던가. 솜털처럼 작은 씨앗의 부피를 순간에 빗댄 재치가 놀랄 만하다. 보이는 사물을 안 보이는 시간으로 바꿔놓았다. 처녀의 가슴을 담배씨만치 보는 찰나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것은 전자시계로도 잴 수 없다. 이렇게 작은 씨가 움이 트고 잎이 되고, 그 잎이 연초가 되어 온 세상을 덮는다. 실로 한 초목의 장대함을 견줄 데 바이없다.

담배의 근본은 이러한대, 이 나라에 들어온 연초의 족보도 따져보아야 하겠다. 담배를 왜초(倭草)라던 기록이 있으니, 필시 임란 때 쳐들어온 섬사람들이 엽초(葉草)를 흘리고 간 듯하다. 서초(西草)라고도 하였으니, 서양에서 대륙을 거쳐 들어오기도 했겠다. 조선조가 기울어질 무렵, 일본 장사치들이 이 땅에 담바고(淡婆姑)를 몽땅 퍼 안겨주었다. 사직의 운명이 서산마루에 걸려 있는데, 그때도 조정에서는 싸움박질만 하고 있었으니, 백성들은 석탄백탄 타는 가슴을 담뱃대로 찔러댔다. 팔도강산이 담배 연기 자욱한 틈에 왜인들은 조선 엽전을 몽땅 쓸어가 버렸다. 왕조가 일본 빚을 고슴도치처럼 짊어지자, 상감을 비롯하여 만백성이 담뱃대를 꺾어서 모은 돈으로 나라의 빚을 갚고자 일어섰다. 어디 될 말인가. 이내 조선 왕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세상이 바뀌어 담배 끊고 나라 찾자는 시대는 거하고, 담배 끊고 장수하자는 시대가 내하였다. 2년 전 무렵이었다. 애연가들은 TV 보기가 무서웠다. 켜기만 하면 흡연자들을 닦달질했다. 한 발을 저승에 딛고 있는 코미디 황제가 나와서 생야단을 쳤다. 흡연은 허파를 연탄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담배는 임산부나 청소년에게 독초나 진배없다고 겁을 주었다.

애연가는 10년은 먼저 간다고도 하였다. 이렇듯이 타일러도 황제 폐하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흡연자는 별로 없었다. 장수하자는 자 많으나 금연하는 자 적다. 그 까닭은 모르다가도 알 일이다. 속세의 인간들은 안 좋은 일, 나쁜 짓은 더 기를 쓰고 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를 세상에서 몰아내는 방책이 있다.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 세상에 흡연의 폐해를 강조하지 말고 끽연의 장점을 홍보하면 된다. 죽마고우도 친구를 배신하고 조강지처도 영감님을 냉대한다. 담배는 일편단심 영원히 변절하지 않는다. 천만 가지 근심 걱정 담배 한 모금에 사라진다.

담배는 지겨운 인생의 위안자요 반려자다. 담배를 피우면 구멍가게 할머니에게 적선이 되고, 연초 공장 가족들을 돕는 일이다. 담배 먹고 내는 세금, 나라 살림 좌우한다. 애연은 곧 애국이다. 흡연자들은 이 좋은 세상을 일찍 떠나 주어서, 이웃 사람들이 복지 혜택을 더 누리게 한다. 흡연이 이렇듯이 선행이요 덕행이라는 진리를 깨치면, 아무리 골초라도 당장 금연을 단행할 것이다.

속세의 인간들은 대체로 좋은 일, 착한 일은 기를 쓰고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금연 천하를 만드는 일이 이렇게도 빠르고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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