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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국수 한 그릇 / 김진악

부흐고비 2021. 1. 22. 17:00

우리 마을 앞 언덕배기에 초가 한 채가 따로 있었다. 대문도 없는 집이었다.

광복 다음 해 봄, 그 지붕에 난데없이 대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꽂혔다. 가끔 그 집 울타리를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가 온 마을에 안개처럼 울려 퍼졌다. 교인이라야 부인네 예닐곱, 초등학생 대여섯이었다.

대처에서 집사 노릇을 하던 분이 귀향하여 왔다가, 자기 집 마루에 차린 예배당이었다. 집사님은 키가 작고 검은 테 안경에 중절모를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과 닮았다.

그해 여름, 나도 꼬마 예수쟁이가 되었다. 난생처음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목사님 말씀도 들었다. 반백 년이 더 지난 옛일, 이제는 그 초가 예배당의 기억이 아스라하고 집사님의 얼굴도 감감하나, 오직 한 그릇 국수를 얻어먹은 일만은 잊히지 않는다.

내가 교인이 된 지 이틀 만에 친구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초상집에 교인들이 모두 모였다.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이 깔려 있고 몇 개의 밥상이 놓여 있었다. 신자들은 모두 거기에 맞대 앉았다. 임종 예배를 마치자, 이내 국수 사발이 나왔다.

그때 국수 한 그릇은 대단한 먹거리였다. 교회에 다닌 애들은 어른 틈에 끼어 앉아서 국수를 행복하게 먹고 있는데, 우리를 예수쟁이라고 놀리던 친구들은 우리 주위에 서서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엊그저께 교인이 된 나는 은혜가 충만한 문상객의 자격이 있었다.

밥상머리에서 침을 흘리고 있던 옛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요새도 밥을 입에 물고 웃음을 터뜨린다. 하느님도 한참 웃으셨을 것이다.

믿는 자 복이 있다는 말씀은 만고의 진리다.
- 유머에세이집 <이 풍진 세상을 살자니> 중에서-

맛이 있어야 좋은 글이다. 맛이 없는 글은 한물간 음식과 진배없다. 누구나 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음식맛을 내려면 온갖 양념을 쳐야 한다. 마늘과 생강을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깨소금도 뿌려야 맛깔스러운 먹거리가 된다.

글의 맛을 내려면 어떤 양념을 쳐야 할까. 그 양념의 갈래는 하고 많다. 별의별 양념 가운데 하나만 고른다면 웃음이라는 조미료가 아닌가 한다. 웃음 양념을 곁들인 글이 세상 사람의 배꼽을 빼놓는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없다.

유머에세이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는 짧은 글이다. 이 글은 선천적으로 익살스러운 사람만이 쓸 수가 있다. 억지로 웃기려는 글은 꼴불견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글은 대개 무미건조하다. 인생의 교훈이나 심오한 철학은 교회나 절간에서 찾아야지 수필 작품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뒷사람을 생각해서 첫 눈길을 흐트러트리지 말라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거나, 이런 말은 할 줄 모른다. 나는 하늘과 땅을 받들거나 산천초목을 그리지 않았다. 사람만이 웃음을 지닌 동물이기 때문에 나는 인간이 연출하는 골계적 행동에 흥미가 있다. 특히 한국인의 웃음은 내 평생의 연구과제다.

한국인의 웃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국인은 무엇에 대하여 웃는가. 한국인은 왜 웃는가. 한국인은 어떻게 웃고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일평생 한국인의 웃음에 대하여 글을 쓰고 책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웃음의 원형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웃음은 인간의 깊고 넓고 신비하고 오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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