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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안사람 이야기 / 김진악

부흐고비 2021. 1. 22. 12:59

남들도 그러기에, 어느 화사한 봄날, 집사람 칠보단장을 시켜서 부부동반 나들이를 하였다. 장안에서도 한복판 명동 거리를 바자니는데, 유리창 속에 벌여놓은 금은보석을 구경하고, 옷가지도 들여다보는 눈요기를 할 만하였다. 청승맞게 둘이서 손을 잡고, 동서남북 기웃거리는 꼬락서니가 오래간만에 상경한 와룡선생, 바로 그 모양새였다.

배가 촐촐하여 아내가 소원이던 자장면을 먹고, 리어카 목판에서 구슬 가방도 하나 골라 샀다. 가난한 남편의 호주머니가 달랑달랑하였으나, 예까지는 아무 탈이 없었다. 안사람은 좋은 남편을 두었다고 행복이 넘치는 듯하였다. 입가심으로 아내가 석 달하고도 열흘 동안 비싸다고 되뇌인 커피도 마셨으니 말이다.

사건은 버스정류장에서 벌어졌다. 어쩌다가 보는 옛친구와 만났다. 서로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예까지도 별일은 없었으나, 호사다마라, 그 친구 내 안사람을 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뚱딴지였다.

"자네는 효잘세. 자당님을 모시고 나왔군!"

초로에 빨리도 노망한 친구와 헤어진 뒤에, 나는 아내를 위로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안사람은 한번 작게 웃고 그만이었다. 바깥양반은 안절부절못하는데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마음쓰기로 말할작시면 남편은 남산이요, 아내는 북악산이었다.

명동 사건 이후, 이십 수년이 지난 엊그제도 우리집 왕비를 서운하게 한 일이 또 일어났다. 우리 집에서 어부인을 왕비라고 부르는데, 이 미풍양속이 널리 퍼져서 우리 앞집에서도 안주인을 왕후로 떠받들고, 뒷집에서도 덩달아 중전마마로 대접하면 좋겠다. 온 세상 사나이들은 너나없이 왕이 되고 싶지만, 어중이떠중이 다 임금이 될 수 없으니, 저마다 부인을 왕후로 여기고 중전마마로 모셔서, 남편들은 스스로 대왕전하가 되어 환대를 받고 영화를 누리자는 것이다. 천하의 못난 남정네들에게 권할 만하다.

우리 궁정의 중전마마를 알아보지 못한 자는 동사무소 서기 였다. 내가 주리틀고 있는 서재로 새어들어오는 말소리를 듣자니, 무슨 용무로 왔다거니, 도장이 있어야 한다거니, 옥신각신하더니, 사나이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인 좀 보자고 해요."

몇 마디 말이 오가고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는 듯하였다. 동사무소 나리가 간 뒤, 중전은 상감의 방에 대고 아뢰었다.

"날 파출부로 알았나 봐."

남편은 동서기 멱살을 잡고 싶은데, 아내는 무사태평이었다. 생불(生佛)이 따로 없다. 역시 바깥양반이 한강이라면, 안사람은 황해바다였다.

백두산의 정기가 내리고 황해 용왕이 점지하여 중전은 두 공주를 두었다. 후사를 염려하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상감은 따로 여러 빈을 두지 아니하였다. 아들 딸 구별하지 말라는 국가시책을 준수하였다.

두 딸의 이름은 보라와 다원이라 지었다. 이 여인을 보라. 다원하는 사람이 되라. 뜻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효녀들이 심지를 잘 뽑아서 명문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대학에 다녔으니, 귀한 아드님을 천안삼거리로 내치고, 예쁜따님을 제주도로 귀양보낸 부모님들에게 황송하였다.

딸들이 혼기가 다가오는데, 팔도강산에 뭇 떠꺼머리총각들이 우리 딸들을 다 원하여 다투어 보려고 몰려오기를 바라지만, 세상만사 제멋대로 될 리 있는가.

가장이 물려받은 재물이 없고, 직업이 접장이라 가세가 날로 기울어서, 궁여지책으로 집사람이 사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포장마차 주인도 사장 행세를 하는데, 약국의 국장을 여사장이라 부른대도 누가 탓하랴. 아내가 사장이면 남편은 회장이다. 약국 명칭을 회장이 짓고 길일을 택하여 문을 열었다. 둘째 공주의 이름을 따서 '다원약국'이라. 동네방네 사람들이 다 원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전성시를 이루기 바랐다. 없이 사는 달동네 분들, 큰 병나기 빌면 천벌받을 일이고, 그저 고뿔에 걸리거나 배탈이 나거나 넘어져서 팔꿈치 까질 만큼만 다쳐서, 그때마다 우리 약방에 왔으면 하였다.

바야흐로, 다원약국 여사장, 약장사를 하는데 실로 요란하것다. 다투어 약 먹으러 오는 손님은 별로 없고, 지나가던 온갖 잡새들이 방앗간 드나들 듯하는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잡상인들이 들락거리는데, 들러가고 쉬어가고 물 먹고 가고 담배 태우고 한잠 자고 가니 실로 가관이었다. 이만저만해도 회장님은 여사장님을 탓하지 않았다. 약 파는 집에 되레 제 물건 팔고 가니, 파는 약 한 가지에 사는 물건은 열 가지라, 꿀 장수 가짜 꿀 놓고 사라지고, 돗자리장수 봉 씌우고 달아나고, 할머씨 빈 보퉁이 담보로 노잣돈 꾸어가고, 월부책으로 노적 만들기, 하 기가 막혀, 어떤 불한당은 여사장님 자리 비운 사이 약품을 죄 쓸어가기도 하였다.

어디 이뿐이랴. 회장님이 퇴근길에 들러 보면, 약국이 아니라 동네 부인네 사랑방일시 분명하였다. 할머니, 아주머니, 색시 할 것 없이 앉거니 서거니, 애를 안고 있는 여인네, 들쳐업은 부인네, 뜨개질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계모임인지 반상회를 하는지, 왔던 손님 기겁하여 번번이 되돌아갔다. 이러기를 한두 번이 아니어서 마침내 회사의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아내의 잘못을 묻지 않기로 하였다. 이십 수년 동안 쌓은 공이 허문 공보다 크기 때문이었다. 권력이 없고 재물이 없고 건강이 없는 가장을 헌신적으로 내조하였고 두 딸을 곱게 길렀다. 밍크 목도리나 다이아반지를 탐하지 아니하였다. 가상한 일은 내자가 수많은 복부인들을 제치고 아파트 추첨을 따내서, 서울 강남하고도 압구정동, 한강물 창밑에 남실거리는, 5천만 동포가 선망하는 아파트 보금자리를 장만하였다. 안사람이 조그만 사업을 거덜냈다고 하여, 바깥양반이 일성대갈 진노한다면 그야말로 소인배다.

인생무상이라. 비바람 찬 서리에 내자의 머리에 하나 둘 흰 털이 생기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만 간다. 반백이 된 안주인은 외할머니가 되겠다고 아침저녁으로 전화통 곁에서 살고 있다.

"우리 딸은 재수했는데...... 의사가 나왔다구요? 많이 해달랄 텐데...... 선생 딸이라고 한번 보잔다구요?"

팔불출이 되어도 좋다. 나는 요로코롬 사는 아내를, 입술에 침을 바르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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