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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부호의 가출 / 이혜숙

부흐고비 2021. 1. 29. 13:17

어느 날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열었다 문장 한 줄을 쓸 때까지는 몰랐다 자판을 눌러도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게 웬일이지 쉼표와 물음표도 마찬가지다 부호를 찍을 수 없게 되자 숨이 막혀 오고 다음 문장을 이을 수 없다 자판이 이상해진 것 같아 입력의 문자표를 찾았다 일반 구두점에 필요한 문장부호들이 주르륵 다 들어있다 오늘은 화원의 꽃을 보듯 그 모습이 화사하고 정겹다 열기만 누르면 된다 좀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조차도 안 된다 느낌표 쉼표 따옴표 말줄임표 다 있는데 도대체 왜 안 되는 건지 한 줄에서 더 나가지 못한 채 부호가 있는 자판이란 자판을 한 번씩 눌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이상한 글이 뜬다.

“우리 찾으려고 애쓰지 마. 활자의 종노릇이 싫어서 떠나는 거니까.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혹사당한 게 억울해. 단어와 문장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당신, 우리 없이 잘 해보라고……. 애들아, 가자! -부호연맹-.”

이런 황당한 일이 그러니까 문장부호들이 짜고서 가출을 하겠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다 쓰려던 글은 날아가 버리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전단지에 쓸 문구를 써내려가지 시작 한다

부호를 찾습니다

물음표 낚시 바늘이나 갈고리 모양으로 생겼음 의심이 많아 항상 묻고 목소리가 큼 주장이 강하지만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 장점

느낌표 야구 방망이 같이 생긴 외모와는 달리 폭력성 없음 감성이 풍부해서 작은 일에도 감동을 잘하지만 어느 땐 조절이 안 돼 자기 망상에 빠지기도 함

쉼표 부드럽고 유연하며 줄 세우기를 잘함 씨앗에서 막 발아한 싹 같이 생겼음 단절을 싫어해서 항상 남의 가교역할을 하는데 가끔 걸음이 느려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경향이 있음

쌍따옴표 한 번 입을 열면 쉬지 않고 말을 쏟는 열변가 겉으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해서 쉼표 모양 네 개를 액세서리처럼 주렁주렁 달고 다님

따옴표 쌍따옴표와는 반대의 성격 사색 형이며 필요한 것 중요한 것을 잘 집어내 강조하는 역할을 함 입 밖으로 말을 뱉지 않아 속을 알 수 없을 때도 있음

말줄임표 가슴에 품고 가는 형 회한과 감상에 잘 빠짐 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여운을 남김

마침표 마무리에 능함 깔끔하고 단정한 생김으로 점 하나 찍으면 더 이상 이을 수 없이 끝남

생김과 성격을 쓰다 보니 문장부호들이 그립기 그지없다 그들이 없는 글은 온갖 재료로 정성을 다했어도 양념을 넣지 않아 모양만 그럴싸한 음식 같다 음향 없이 보는 영화화면 같다 속옷을 입지 않고 외출한 기분이다 연료가 바닥난 자동차 방전된 핸드폰 어떤 표현도 부호 없는 글에 대한 아쉬움을 대신해주지 못 한다 그들이 돌아와야 활자에 생기가 돌고 문장도 탄력을 받아 나갈 텐데

생각해보면 물음표가 잘 생겼지 그 낚시 바늘에 걸리면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지 쉼표는 또 어떻고 가는 길 숨찰까봐 쉬엄쉬엄 쉬어가라는 배려가 얼마나 고마워 여백의 아름다움은 말줄임표를 따를 게 없지 마침표로 끝날 때의 쾌감 그것 없이는 어떤 글도 끝낼 수 없잖아

부호들아 돌아와 너희들이 오해한 모양인데 자음 모음 만나야 소리가 완성되는 게 아니야 너희 하나하나가 어디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잡문이 명문이 될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한 사람의 작가를 죽이고 살리는 힘이 너희에게 있다는 것을 잘못했다 필요 이상 쓰고 제자리 찾지 못하고 아무데나 찍어놓고 됐다고 했던 것 용서하라 앞으론 정말 잘 할게

집 나간 가족에게 용서를 빌며 돌아오길 간청하는 심정이다 지금은 황금 주머니를 찬 부호富豪가 들어온대도 반가울 것 같지 않다. 눈앞에 고물고물한 부호의 모양만 아물거릴 뿐이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글을 썼는가. 머릿속의 생각과 문장의 표현으로 완성했다고 믿었던 글, 사생아와 미숙아를 내놓고도 나 몰라라 한 것이 이제야 보이다니…….

무심히 자판을 눌렀는데 어느새 부호들이 돌아와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와 찍힌다.

반가운마음으로부호들을맞이한다.이제부터다시시작이다.첫줄을쓴다.그런데또이상하다.이번엔띄어쓰기가안된다.형체도갖추지못하고없는듯간격을띄어주던쓰기가제존재를알려온것이다.빡빡한화면을어쩌지못하고바라보자니그동안살면서띄우지못한간격과다가가붙어보지못한자리눈에보이지않는다고믿지못하고무시한존재들이떠오른다.

컴퓨터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은 부호와 띄어쓰기가 아니었다. 더 이상 핑계와 이유를 댈 수 없는 나는 조용히 물러난다. 언젠가 이런 전단지를 만날지 모르겠다. 그때는 돌아갈 수 있을지.

“찾는 사람, 이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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