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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밥그릇 / 이종화

부흐고비 2021. 1. 29. 11:04

아, 드디어 집이다. 늦은 밤, 곤죽이 되어 택시에서 내렸다. 오늘도 하루라는 숙제를 마쳤다. 불 꺼진 아파트의 창들, 새벽의 도시는 어쩜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을까.

하수구로 흘러드는 물줄기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홀짝홀짝 물을 마시며 사람 눈치를 살피는 그 가여운 목선이 아릿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본다. 정오에 멈춰있다. 내가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어 먹기 바빴던 그 시간, 이 녀석은 소리도 없이 죽었던 거다. 그 놈의 밥이 없어서.

더운 물에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운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아침잠을 깨우는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맞다, 오늘이 월급날이었지. 잠결에 실눈을 뜨고 액수를 확인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때 되면 꼬박꼬박 통장에 밥을 넣어주니. 덕분에 난, 내 시계처럼 굶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사무실은 밥그릇들이 모여 숨 쉬는 곳이다. 실적에 목을 매는 밥그릇, 어제의 말이 오늘과 전혀 다른 줏대 없는 밥그릇, 늘 좋고 싫음이 애매한 그저 그런 밥그릇, 최선을 다하지만 센스가 부족해 비웃음을 사는 밥그릇, 자기 밥도 못 챙겨먹는 못난 밥그릇, 그러다 저희들끼리 부딪혀 깨지기도 하는 이곳에선, 새카맣게 속이 타들어가도 얼굴에 웃음 하나쯤 잘도 붙이고 산다.

밥그릇들이 직장에서 겪는 굴욕은 생존의 당위성 앞에서 무력해지곤 한다. 밥그릇들은 서로 대신해 줄 수 없다. 함께 힘을 모아 직장이란 커다란 솥에 밥을 지으면, 제각기 개미처럼 달라붙어 자기 밥그릇에 밥을 담아가기 바쁘다. 그렇게 어렵게 구해온 걸 온 식구가 둘러앉아 각자의 목구멍 속에 열심히 투입하는 게, 삶이다. 그 밥을 먹고 누룽지까지 샅샅이 긁은 뒤, 깨끗이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밥그릇들은 다시 일터로 나가 밥을 구할 것이다. 처음에는 밥을 구하기 위해 저마다 거리로 나섰지만, 결국 밥벌이를 위해 밥을 먹는다.

밥그릇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허영심은 남의 밥그릇까지도 자신의 밥그릇에 편입시키려 한다. 숱한 밥그릇들이 모인 이 사회에서 크고 튼튼한 밥그릇은, 작고 깨지기 쉬운 밥그릇들을 품고 위세를 떨친다. 이쯤 되면 밥그릇은 권력이 된다.

어떤 방법으로 그리 거대하고 견고한 밥그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먹고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이 밥그릇 중에는 스스로 만든 질서와 규율에 맞서는 작은 밥그릇을 ‘악’으로 규정하는 옹졸한 그릇들도 있었다. 밥벌이를 위해 자신의 밥그릇에 교묘히 남의 밥을 담고, 그 밥을 선심인 양 생색내며 되돌려주는 이 시대의 위선자들. 자신의 잘못을 적당히 눈감아주는 조그마한 밥그릇들에겐 제법 밥도 고봉高捧으로 담아주는 넉넉함으로, 그들은 이 대도시의 철밥통이 되었다.

떳떳이 살고 싶으면 내 밥그릇 하나쯤 포기할 용기도 있어야 하건만, 굶주림과 따돌림. 그 두려움 앞에서, 나의 소신은 그저 허울일 뿐이었다. 제 밥벌이를 위해 ‘허명虛名’을 미끼로 자신의 밥그릇에 남의 몫을 담는 이들이 넘치는 이 사회에서는, 아예 내 밥그릇 따윈 없는 게 더 나을 지도 몰랐다.

형과 내가, 각자의 작은 밥그릇에 쌀을 담아오면 어머니는 밥을 지어 주신다. 아침식사는 꼭 하고 가라는 어머니. 이른 아침, 우리 집 안팎에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참 좋다. 잡곡에 콩을 섞어지은 밥이 키를 세우면, 어머니는 밥솥의 쌀과 잡곡을 소담히 퍼 아침상에 올린다. 집에서 아침 한 끼만 먹는 날이 많은 평일엔 생선에 고기반찬까지, 찬饌이 족히 열 가지는 넘는다.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수저. 아마도 어머니는 우리가 출근한 뒤, 우리가 남긴 헌 밥을 드실 것이다. 그렇게라도 먹을 걸 좀 아껴두어야 우리가 밖에서 조금이나마 떳떳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오늘 퇴근길에도 그 도둑고양이를 보았다. 이번에는 쓰레기더미 위에 올라타서 무언가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저 녀석은 그렇게 제 밥그릇에 밥을 채운다, 눈치를 살피며. 작은 밥그릇의 비애, 아니 나의 비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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