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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비 / 장석주

부흐고비 2021. 1. 29. 11:29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이가 곁에 없으니 죽은 혼령이라도 불러내 함께 술 마시고 싶다. 술상을 본 뒤 뜰의 소나무에게 작위를 주고 대작을 한다. 나 한 잔 소나무 한 잔. 모란꽃망울이 맺었으니, 이 아니 기쁜가, 하고 한 잔. 박새가 우편함 속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으니, 이 아니 신기한가, 하고 또 한 잔. 봄비 속에 날이 저물고 건너편 함석집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오른다.

여름비ㅡ 여름비는 장대비다. 봄비가 소심하다면 여름비는 대범하다. 봄비가 숙고가 깊다면 여름비는 의지가 굳고 뜻이 강직하다. 그래서 한번 내리는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마당 끝에 서 있는 석류나무가 예비신자 교리반에 든 신실한 처녀같이 비를 맞는다. 석류나무는 그레고리안 성가에 귀를 기울이듯 여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름비는 닷새고 일주일이고 연이어 내린다. 금세 도랑물이 넘치고 밤새 물 내려가는 소리가 크고 거칠다. 하천이 범람하면 밤마다 그 하천을 길 삼아 돌아다니는 너구리 어미와 그 새끼들은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도시에서 갑작스럽게 비를 만나면 연인들은 카페나 영화관으로 피신한다. 비 오는 날엔 카페와 영화관이 젊은 연인들로 붐빈다. 나는 여름비에 꼼짝도 못 하고 거실에 갇혀 지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쇠똥구리로 변해 있었다. 몸통은 딱딱하고 머리에는 더듬이가 돋아 있었다. 여름비가 내릴 때는 이런 변신도 그다지 신기한 일이 못 된다. 나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일어나 책을 읽고 대나무 발 너머 벽오동 잎사귀에 후둑이는 빗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잔다. 그리고 깨어나 메추리 알 두 개를 먹고 풀잎을 조금 뜯어 먹은 뒤 바느질 하는 중국 소녀에 대해 5분간 생각했다.

가을비ㅡ 가을비. 들은 텅 비고 허수아비들은 갑자기 실직을 한다. 그 텅 빈 들을 적시며 비가 온다. 모든 곡식을 다 거둔 뒤 내리는 가을비는 쓸모없다. 그 잉여. 그 한가로움. 젊어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았다. 가난, 중도 퇴학, 실연, 사업실패들이 이어졌다. 가난 때문에 5남매는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소풍을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었다. 나는 드라큘라처럼 책들의 희미한 목에 이빨을 박고 그 정수를 빨아먹었다. 그 순조롭지 않음도 기회라고 여겼다. 번성했던 제국들도 멸망하는데, 나 하나쯤의 실패가 무슨 대수일까. 그 기회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나태하지 않고 부지런히 할 수 있었다. 젊은 날엔 부지런한 방앗간 집 주인의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역경과 대면하고 싶지 않다. 되도록이면 역경을 피해 순조로운 노년을 맞고 싶다. 평생 순종하는 착한 아내와 같은 순조로운 노년을 맞고 싶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다. 내게는 아무래도 시각을 청각의 세계로 바꾸는 일이 불가능할 듯싶다. 나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아무도 읽지 않을 자서전이나 열심히 쓰고 싶다.

겨울비ㅡ 겨울비는 희생양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태만, 과오, 기만을 숨기기 위해 비를 이용한다.(마르탱 파주) 모든 게 비 때문이었어. 내가 늦은 건 비 때문이야. 내 연애가 깨진 건 비 때문이야. 내가 취업에 실패한 건 비 때문이야. 비는 모든 통계에서 부정확과 착오의 원인 제공자로 오해되었다. 비는 오랜 세월 동안 누명을 쓰고 본의 아니게 악명을 떨쳤다. 그것은 비의 잘못이 아니다. 비는 무죄다. 겨울날 이른 저녁 금광 호수 일대를 적시며 오는 겨울비는 무죄다, 무죄다, 라고 중얼거리며 내린다. 겨울은 들과 대지를 유형지로 바꾼다. 떠날 것들은 남김없이 떠나고 난 뒤 아직 유배가 풀리지 않은 것들만 남아 비를 맞는다. 차가운 비는 창살들이다. 비는 창살들 속에 들과 대지를 가둔다. 겨울비 내리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지나간 생과 그 생이 품고 있는 과오들에 대해 길게 후회하는 일만 남는다.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쉼보르스키 <작은 별>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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