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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끝별 시인

부흐고비 2021. 2. 13. 11:23

천생연분/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 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쓴 밥을 몸에 좋은 약이라 생각하며// 꼭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까마득한 날에/ 정끝별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밥 하면 순간 숨이 뚝 끊기는// 밥들의 일촉즉발/밥들의 묵묵부답//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남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 심/ 정끝별

돌고 돌다/ 설설/ 기고 기다/ 급기야/ 바닥에 박히는/ 부동심법// 저 찰진/ 호구의/ 힘// 좆, 팽이//

통속/ 정끝별

서두르다를 서투르다로 잘못 읽었다/ 잘못 읽는 글자들이 점점 많아진다/ 화두를 화투로, 가늠을 가름으로, 돌입을 몰입으로,/ 비박을 피박으로 잘못 읽어도 문맥이 통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네 살배기 딸도 그랬다/번번이 두부와 부두의 사이에서,/ 시치미와 시금치 사이에서 망설이다/ 엄마 부두 부쳐준다면서 왜 시금치를 떼는 거야 그래도 통했다// 중심이 없는 나는 마흔이 넘어서도/ 좌회전과 우회전을, 가로와 세로를, 종대와 횡대를, 콩쥐와 팥쥐를,/ 덤과 더머를, 델마와 루이스를 헷갈려 한다/ 짝패들은 죄다 한통속이다/ 칠순을 넘기신 엄마는 디지털을 돼지털이라 하고/ 코스닥이 뭐냐고 하면 왜 웃는지 모르신다// 웃는 육남매를 향해 그래봐야 니들이 이 통속에서 나왔다/ 어쩔래 하시며 늘어진 배를 두드리곤 하신다/ 칠순에 돌아가셨던 외할머니는 이모를 엄니라 부르고/ 밥상을 물리자마자 밥을 안 준다고 서럽게 우셨다/ 한밤중에 밭을 매러 가시고 몸통에서 나온 똥을 이 통 저 통에 숨기시곤 하셨다// 오독이 문맥에 이르러 정독과 통한다 통독이리라//

날아라! 원더우먼/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 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 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명지대학교 교수 정끝별은 1964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시 부문 신인상에 '칼레의 바다' 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오룩의 노래』, 여행산문집 『여운』,『그리운 건 언제나 문득 온다』와 시선평론 『시가 말을 걸어요』, 『밥』 등이 있다. 2004년에 제2회 유심작품상 시부문을 수상하였으며, 2008년에는 시 '크나큰 잠'으로 제23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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