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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녀의 유언은 좀 충격적이었다. 친구의 친구이니 좀 촌수는 멀지만 같은 또래의 나이인지라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있다.

H는 말기 암으로 죽음을 선고받고 있었다.
"나도 놀랐어. 그렇게 사랑이 대단한 건지......"
내 친구는 곧 죽음을 맞이할 자신의 친구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H는 평범한 주부였고, 성실한 삶을 살아왔었다. 자녀는 둘, 모두 장성했고 대학생이 되어있었다. 남편과도 그때까지 별 의견 충돌 없이 살았고 그 덕분으로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모범부부로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살림도 짭짤하게 알뜰히 살아 냈고 그것에 별로 회의나 갈등도 보이지 않았던, 그야말로 '문제없는 삶', 만족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온 여자였다는 것이다. 바로 그 행복의 주인공이었던 여자는 어느 날 의사로부터 청천벽력의 사형선고를 받고 병상에 누운 채 마지막 날을 별 대책 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아니 무슨 말이길래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나는 머뭇거리는 친구에게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옆구리를 찔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렇게 행복하고 별문제 없이 살았던 그 친구가 말이야, 죽음을 앞두고 자식 걱정에 앞서 글쎄 '근사한 사랑 한번 못하고 죽나봐….' 그러지 않겠니."
"장난이 아니고?"
내가 물었다.
"뭐 두려움과 불안을 견디기 위한 장난기도 없진 않았겠지만 진심 쪽에 더 가까웠다니까, 혼자 말처럼 다시 말 하더라구. '근사한 사랑 한번 못해보고….'라고

나는 친구와 함께 웃으며 조금은 당혹스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어쩌면 조금은 농이 섞이긴 했겠지만 그녀의 말이 죽음을 앞둔 한 여자의 진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뜰한 살림 솜씨, 다정한 부부관계, 천재적인 자녀, 그것은 그녀의 꿈이거나 소망이기보다 그녀가 가꾸어 간 현실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현실 속에서 그녀의 꿈, 그녀의 소망은 늘 외롭게 그녀 가슴속에서 적막하게 엎드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그녀의 결혼생활과 전혀 무관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도록 혼자 생각하였다.

결혼생활이 행복했다는 것은 그녀의 성실한 성격이 만들어낸 노력의 대가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그 가정생활과는 반대로 추위에 떨고 있었다고 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것을 모순이나 배반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매로 만나 연애 비슷한 감정으로 결혼을 했고 다행이 서로 잘 맞아 별 불편 없이 결혼생활을 성공시켰다고 해서 그녀에게서 근사한 사랑이야기의 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전율이 느껴지는 운명적 사랑에 대해 목마른 그리움을 나타냈고 그렇게 해볼 수 없었던 미지근한 자신의 삶에 문득 패배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비록 상처투성이로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기더라도 온몸에 전율이 일고 생명을 나눌 수 있는 운명적인 사랑을 해보고 싶은 것, 결국 헤어지더라도 그런 사랑 한번 해보는 것을 여자들은 진심으로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살았다'라고 힘주어 생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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